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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자식이 이쁘지않은 부모는없다

나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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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자식이 이쁘지 않은 엄마는 엄마도 아니다. 그렇다. 나는 그 엄마도 아닌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나는 딸과 아들 하나를 둔 엄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기에는 참 좋은 엄마일 것 같고 아이들을 잘 길러낼 사람일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여러 가지 가면을 가지고 살았다. 그중에 두드러진 면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내 자식을 대할 때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내게 버겁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기가 울면 어떻게 달래야 할지를 모르겠고 8개월짜리 아기가 물 컵이라도 엎지르면 화가 나서 아기를 혼냈다. 날마다 아기가 잘못 행동하는 것들 때문에 나는 늘 화가 나 있었고 그 아이에게 고쳐주고 알려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늘 아기와 싸우기 일 수였다. 난 아기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잠 잘 때만 예쁘고 나머지 시간엔 내 자식인데도 안 예뻤다. 20개월 터울로 둘째 남자 아이가 태어났고 이제 둘을 길러야 하는 부담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남편이 조금 늦게라도 퇴근하는 날에는 혼자 씩씩대며 열 받아 온갖 신경질을 다 부리고 살았다.

이때까지도 나는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 아이들이 교회 유치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아이에게서만 느끼는 분노를 다른 집 아이에게서도 느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내가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내가 다섯,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분노를 느끼며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이없었다.(그때 나는 주일 학교 아동부 교사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문제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무엇이 문제의 원인이며 왜 문제인지를 몰랐고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말씀도 받고 다짐도 해보았지만 실제 삶 가운데서는 여전히 분노가 올라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날이 갈수록 아이와의 갈등은 깊어갔다. 심지어 매일 회초리로 겁을 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침 등교 길에도 소리 질러서 혼내고 눈물바람으로 학교가게 만들었다. 단 한마디도 고운 말투로 얘기하지 않았고 긍정의 눈으로 봐주지 못했다. 화가 나서 아직 풀리지 않은 채 아이와 싸움을 기다리는 싸움꾼 마냥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버럭 화를 냈다. 당연히 아이들은 주눅 들어 살았고 학교 친구 관계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 또 화가 치밀었고 그 아이에게 너의 이런이런 면이 문제라고 그 아이에게 고치라고만 윽박질렀다.


2008년 겨울,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연구원에서 공부를 하던 친구가 나를 이곳에 초대해 주었다. 나중에 느꼈지만 그 친구의 부름은 주님으로부터 응답이요, 나를 그 수렁에서 건지시는 놀라운 계기였다.
연구원 공부를 하며 하염없이 울었고, 내 안에 엄마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린아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비교당하고 칭찬보다 질책을 더 받아왔던 나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마음에 외로워했고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내가 싫었다. 엄마는 얌전하고 차분한 동생을 더 좋아했는데 왜 난 털털하고 덤벙대고 사내 아이 같은지, 더욱이 엄마는 늘 술에 취해 계신 아빠를 싫어했는데 내가 아빠랑 얼굴도 똑같고 성격까지 똑같다며 “어쩜 그리 지 애비하고 똑 같은지 꼴도 보기 싫다”며 나를 째려보실 때는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아빠도 미웠고 아빠를 닮은 나도 미웠다. 나는 한번도 내 자신이 맘에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완벽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내 기대치에 못 미치는 내가 싫었다. 나 자신조차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를 닮은 내 딸을 나는 예뻐하고 사랑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할지, 내 아이의 12년이란 시간을, 그 소중한 유년시절을 지독하게 망치고 그 아이의 가슴에 멍들게 한 내 잘못을 어찌해야 할지…. 하염없이 울었다. ‘내 아이가 그래서 불안해했구나, 그래서 스스로 결정을 못 내렸구나, 그래서 짜증이 많았구나, 그래서, 그래서…’.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이런 나를 또 미워하려다가 나 자신을 미워함 또한 악순환의 반복이기에 ‘너도 그럴 수밖에 없었잖니!’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나를 용서해 주었다.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어린 아이가 또 다른 어린아이를 데리고 살아내느라 너무 힘들었겠구나.’ 나를 격려하는 이런 마음들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실수를 용납하게 되었고 절대 내놓을 수 없었던 연약한 부분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월요일 상담 공부를 하고 돌아가는 날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또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고, 한편으로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해서 돌아갔다. 아이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고, 사랑스럽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실수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나이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에 자연스러워졌다. 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걸 보며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다.


정태기 원장님의 말씀처럼 내가 바뀌니 내 아이들이 바뀌었다. 점점 짜증 섞인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집에서 언성 높여 싸우는 일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고 마음을 조금씩 읽을 수가 있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짜증으로 반응하던 아이가 마음을 읽어주니 짜증을 냈다가도 금세 꼬리를 내리며 자기가 왜 그러는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기뻤다. 서로 자기의 속마음을 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된 것이 참 좋았다.

그러면서 나의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제서야 엄마도 한 여인으로 보이고 한 인격체로 보이면서, 시부모를 섬기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에서 일하고 들어와 지친 몸으로 집안 살림을 해야 하는 한 여인이 딸 다섯에게 다정하게 할 수도 없었겠고, 자상하게 신경 써주며 사랑의 표현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닌데… 그 삶에서는 최선을 다해 사시면서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하셨는데…, 나이 40이 되어서야 엄마의 삶이 읽어지니 얼마나 철없는 딸인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고맙다, 미안했다”란 한마디에 모든 응어리가 풀렸다. 엄마에게 받았던 서운함도 상처도 이제는 별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고생하시며 못난 딸을 지금껏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계신 엄마께 눈물로 감사의 표현을 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연구원의 세 번째 영성수련을 통하여서는 너무도 싫어하던 아버지를 만났다. 다혈질적이고 폭력적이며 알콜중독으로 생을 마감하신 내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나에게 다정하게 건네 본 적 없는 아빠. 나에게 눈빛 한번 곱게 보내주지 않았던 아빠, 어디 존경할 데라고는 한군데도 없는 그저 술 취해 억울한 소리로 늘 나를 울리던 아빠. 그런데 내가 삶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그리움을 만나려 했을 때 나는 아빠가 떠올랐고 내가 그렇게도 가슴으로 그리워하던 그 무언가가 아버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 연령의 리더를 짝궁으로 만나, 내가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를 만나고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나를 사랑하신다는 진심어린 소리를 들으니 마음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버지에게 안겨서 실컷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멈춰지지 않는 눈물을 통해 내 마음이 씻겨 내려감을 느꼈다. 내가 상대를 등지고 떠나려 할 때 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야! 가지마! 가지마! 돌아와 ○○야! 내 이쁜 딸아!”라고 불러주셨다. 나를 잡아주고 불러주신 아버지를 향해 나는 아이 같은 마음으로 달려가 안길 수 밖에 없었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도 날 사랑하셨다는 것을 이제 알겠어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몰라 미소 띤 얼굴 한번 보여주지 못하셨군요! 아빠, 나도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미안해요. 저도 아빠를 회피하기만 했지 이렇게 사랑받고 싶어 하며 그리워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누구보다 포부도 있었고 남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던 아버지, 그러나 매일 힘겨운 농사일에 시달리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을 거듭했던 아빠의 쓸쓸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나는 왜 그동안 아빠의 마음을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았을까? 왜 아빠를 남처럼, 내 아빠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나와 관계없는 사람처럼 대했을까?
작년에 세상을 떠나셔서 얼굴을 뵙고 용서를 빌 수는 없지만 영성수련 이후 아빠 얼굴을 떠올릴 때면 아빠가 날 향해 웃고 계신다. 날 사랑하고 계심을, 내 마음을 다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 웃는 모습을 나는 바라본다.
세상에 자식이 예쁘지 않은 부모가 없듯이 우리 부모도 나를 속으로 예뻐하셨겠구나. 단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그분의 방식으로 표현하셨겠구나….

우리 부모가 그랬듯 나도 내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다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배우는 사랑의 방법들을 내 아이들에게 실천하며 그 아이들에게 있는 상처들도 언젠가는 치유되길 바라며, 아이들도 나의 이 부족한 사랑을 언젠가는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느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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