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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의 여행

최순옥

  • 조회수2,009



직장에서 극동방송을 벗삼아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던 어느 날, 치유상담 연구원 정태기 총장님의 가녀린 음성을 통해 흘러나오는 힘있는 메시지는 내게 신선한 울림을 전해 주었다. 그동안 이웃 지인과의 대화에서 그 아내는 부부싸움을 하면 가슴에 묻어 놓은 아픔들이 굴비를 엮은 듯 끝도없이 흘러나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고 한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참 안타까웠다. 총장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상처를 치유받는 곳이 있다면 내가 먼저 배워서 이웃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분을 그곳으로 안내하여 모든 상처를 치유받고 자유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빠의 독특한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큰딸도 조금이라도 빨리 상처를 치유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치유상담 연구원의 문을 두드렸다.

매주 월요일 오후 7시가 되면 나는 직장인에서 학생으로 신분세탁을 하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 정태기 총장님의 “준비”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 지금 좋습니다. 지금 감사합니다, 지금 사랑합니다, 지금 행복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지금 이루어집니다. -아멘-” 우리는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아버지 앞에 고백하고 수업을 듣는다. 많은 체험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강의는 “아하, 그렇구나”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 보면 1교시 수업이 끝난다. 연구원에 와서 강의를 들으며 “추억”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 어머니, 시골교회, 남편, 두 딸, 나의 이웃들 등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참 많은 추억들이 있다. 난 오늘 그 추억들을 살며시 꺼내보려 한다.


나는 강원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시골에서 2남 5녀 중 6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의 기억은 그저 자상하신 참 좋은 부모님이라는 생각뿐. 가난했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빠, 언니들은 모두 외부로 나가고 남동생과 둘이 놀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성장하여 88년도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나는 부모님과 교회가 좋아 토요일 2시 근무가 끝나면 바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시골집에 도착하면 동네 꼬마들이 한가득 모여든다. 우리 아버지는 “이것이 뭐 그리 좋다고 이리들 모여드노…” 하시며 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주일날, 시골교회에서 성가대와 교사를 하며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월요일 새벽 6시 기차를 타기위해 엄마와 산길을 걷는다. 그리고 울 목사님도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를 배웅해 준다. 저 멀리 손 흔들고 계신 우리 목사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참 예뻤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회사로 향한다.


우리 아버지는 73세에 드라마의 내용처럼 나와 지금의 남편이 사귀는 것을 알고 화를 내시다가 위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교 많은 막내딸! 시집보내기가 싫었나보다. 난 아버지를 살려보겠다고 포천에 있던 한 기도원에 용기내어 답사 갔다가 가슴에서 핏덩이를 꺼내며 암이라고 하시는 여 목사님의 말씀과 안수기도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나왔다. 조금씩 불러오는 아버지의 배를 온종일 맛사지하며 “할 수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믿음만이 믿음만이~” 매일 이 찬양을 입이 닳도록 부르고 또 부르고…. 매일 밤 아버지는 답답하다며 운동하기를 원하셨고 엄마와 열심히 간호하던 어느 날 밤, 피곤하여 엄마께 미루고 잠들었는데…, 아버지 혼자 나갔다가 집 앞 2m정도의 아래 논에 떨어져서 엄마가 한참만에 찾아서 모시고 와 목욕을 시켜드리셨단다. 다음날부터 밤마다 아버지 손잡고 바람을 맞으며 운동했으니, 마을 어른들 나보고 효녀란다. 어느 날 엄마가 아버지가 드시고 오래 살겠다고 심어 놓으신 “귀리”를 수확하러 갈 때 엄마께 아버지가 조금 이상하다 하니까 금방오시겠다던 엄마, 아버지의 임종을 못 보셨다. 그날도 나는 “믿음만이 믿음만이~”찬양을 부르며 배를 맛사지하고 약을 먹여드리고 무릎에 뉘여 기도하며 또 찬양을 부른다. 남편은 장인어른을 위해 일주일에 2번씩 수박과 온갖 죽을 사서 열심히 날랐다. 아버지는 나의 무릎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나의 결혼식을 일주일 남겨두고서…….


큰딸이 태어났고 남편은 서울로 새 직장을 찾아 떠났다. 꿈에 부풀었다. 집을 지었다, 부수었다 밤마다 꿈을 쌓았다. JAPAN LIFE(자석요) 일명 피라미드 회사란다. 데려온 친구와 처음에는 많이 싸웠지만 들어보니 남편은 할 수 있겠더란다. 자석요 세트 270여만 원,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그날부터 남편은 M.L.M(MULTI-LEVEL-MARKETING)을 새벽까지 공부하며 나름 열심히 했나보다. 남들은 받기 어렵다는 월급을 남편은 첫달부터 70여만 원을 받더니 10개월만에 사장이 되어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정말 화려한 축하파티를 했다. 그리고 사장님 월급이 2,930만 원. 보여주기 좋아하는 그들의 방법대로 남편은 모두 현금으로 찾아왔다. 더 벌수 있다는 말에 나는 연관되어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내 손에 남은 돈은 단돈 100만 원. 정말 앞만 보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노력한 우리 남편은 1년만에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한다. “나 이제 안 할거야!”그들의 말대로 처음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이제 부회장이 되어 마음에 여유가 생겨 뒤돌아보니 실패하고 돌아간 낙오자가 보이더란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가만히 있어도 월급이 올라올텐데 왜 그러냐고 말리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마지막 받을 월급 800여만 원이 있는 것을 알고 아래 직원들의 물건을 모두 반품하도록 하고 그날부터 아듀! 그때의 충격으로 7개월 동안 바깥 출입도 하지 않았고 내게 남겨진 것은 빚, 빚, 빚 뿐이었다.


그 당시 2살, 4살 된 두 딸을 어머님이 계신 장성에 보내고 빚을 갚기 위해 결혼 후 처음으로 삶의 전쟁터로 나갔다. 나는 건설회사에 취직했고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큰딸과 작은딸 목소리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계부를 꺼내어 10원 짜리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를 점검해야만 그 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훌 훌 털고 일어난 울 남편도 급여 외 +∝의 일을 찾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남편은 아이들을 보내놓고 미안한 맘에 가끔은 내 지갑에 10만 원씩 몰래 용돈도 넣어주고, 또 한번은 카메라를 찾는 척 유도를 하더니 장롱 아랫서랍에 만 원짜리를 수북히 깔아놓고 나에게 그것을 찾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두 딸과 어머니를 뵙기 위해 기차를 타고 장성에 갔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으로 수도없이 되뇌이던 말. “하나님, 난 아버지께로 돌아갈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따르릉! 전화 벨소리와 함께 다급한 이웃 어른의 목소리, 우리 큰딸이 졸음운전하던 트럭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갔단다. 더 빨리 딸에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도 있으련만 바보같이 전철타고 기차타고 늘 하던대로 어머니 댁에 도착했다. 어머니께 죄송했고 마루에 앉아있던 3살 된 작은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정신없이 울던 내 남편,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12일만 기다리면 서울에 와서 같이 살기로 약속했는데…. 이사 준비도 다 해 놓았는데… 아~~”

나까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아 정신차리고 들어보니 어머니와 두 딸 모두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데려간 큰딸에겐 미안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을까봐 어머니와 작은딸을 남겨주심에 한없이 감사했다. 순간 “아버지, 아버지도 그때 이렇게 아프셨나요? 내가 그렇게 좋으셨나요?”“내가 뭐라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나요?”하는 마음이 들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추억을 더 꺼내기엔 지면이 작아 마무리 하려한다. 하나님은 내가 너무 연약해 보여서인지 큰딸을 보내고 1년이 안되어 바로 작은딸을 주셔서 다시 온전한 가정의 모습을 만들어 주셨다. 몇해 전, 극동방송 푸른초장이라는 프로에서 10여분 나의 인터뷰 내용이 나왔었다. 그 달의 캠페인이 “자녀들 앞에서 부부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 켐페인에 글을 쓴 것을 보고 왔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서 설거지 하던 나를 안으며 “당신, 오늘 힘들었쪄!!” 하니까 우리 작은딸이 언니를 찾아 둘이서 안으며 “언니, 오늘 힘들었져” 하면서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죠. 그날 우리 네 가족 서로 부등켜 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많이 힘들게 했다. 서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중간에서 많은 선의의 거짓말과 비유맞춤으로 우리 가정은 삐그덕 소리가 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번 영성수련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녀 앞에서만 우리는 사랑하는 부부였고, 자녀들이 보이지 않는 차량 안에서나 산책하며 아이들 문제로 수없는 일방적인 말다툼을 했다. 자녀양육은 남편의 방법이 옳은 것 같았지만 나는 서로 아플가 봐 날마다 남편과 아이들 가운데서 전전긍긍했다. 나는 영성수련에서 돌아와서 가족에게 나의 지혜롭지 못함에 용서를 구했고, 이젠 거짓말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전달할테니까 나 좀 도와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영성수련에서 나는 리더님의 도움으로 작은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훨훨 날려 보냈다.


요즘 공부가 더 재미있다. 그동안은 그냥 즐거움에 들었던 수업이 이젠 조금씩 이해되고 있다. 스폰지에 물이 흡수되듯이…….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이기에 모든 것이 용납이 되는데 내 남편은 이성적인 사람인데 나의 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모든 것이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나의 성격때문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원래 마른 체형을 가진 남편이 큰딸을 살찌우려고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던 나는 남편과 함께 부부학교에 등록하여 공부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 되었다.
연구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부모님의 추억과 어린시절 교회와 목사님의 추억의 아름다움에 감사했고 이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남편과 잘 극복하여 상처가 굴비가 되지 않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김중호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의 내용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와 가족과 이웃 앞에서 언제나 깨어있고 머무르고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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