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양육태도 중에 방치라는 것이 있다. 방치는 자녀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부모로서의 당연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부정적인 양육태도다. 방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자녀를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음식의 방치, 혼자 집에 두고 나가는 돌봄의 방치, 자녀와 이야기하지 않는 대화의 방치,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주지 않는 접촉의 방치, 함께 놀아주지 않는 놀이의 방치 등이다. 그러나 방치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적인 방치라 할 수 있다.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동네 형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들어 왔다면 부모는 아이를 안아주며 마음을 달래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울거나 말거나 부모가 자기의 일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서적인 방치다. 부모가 자녀를 방치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부부의 맞벌이, 지나친 과로, 오랜 질병으로 누워있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경우, 가난, 알콜 또는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있는 경우, 부부의 별거 등이다. 그러나 방치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부모의 이혼과 죽음이다. 부모가 이혼을 하면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중의 한 사람과 헤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지속적인 방치의 문제를 낳는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혼한 부모가 재혼할 경우 발생하는데 그때 자녀는 다른 보호자나 시설에 보내질 수 있다. 부모의 죽음은 자녀에게 상실과 슬픔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각한 방치의 문제를 유발한다. 부모의 돌봄이 일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이혼은 물론 죽음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아동은 부모의 이혼과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휴 미실다인의 관찰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어린시절 부모의 생각과 감정과 삶의 태도를 유사하게 닮은 내면부모(inner parents)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부모의 양육태도에 대한 우리의 내적반응으로 형성된 내면아동(inner child)이다. 내면아동은 성인아이(adult child)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성인아이는 주로 무엇인가에 중독된 가족이 있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의 자아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내면아동은 역기능 가정은 물론 순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의 자아상태에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방치 속에서 자란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는 그런 방치의 양육태도를 닮은 내면부모가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부모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체험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방치하는 내면부모의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의 욕구나 필요를 무시하고 방치하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데 소홀하다는 것이다. 이미 부모는 없다. 자신을 방치했던 부모는 이미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치된 삶을 산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자신을 방치하는 내면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이 자신의 자녀를 방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려서 배우고 습득한 것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쉽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와의 접촉과 놀이가 없었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자녀를 안아주거나 자녀와 함께 놀아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부모의 방치 속에서 자란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는 또 하나의 자아 즉, 방치된 내면아동이 있다. 방치된 내면아동의 문제는 무엇인가? 방치된 내면아동은 항상 정서적으로 배가 고프고 허전함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 그림자처럼 느껴지고 삶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없다. 그 결과 그림자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 도박, 섹스 등 매우 자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가장 주된 감정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다.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이다. 가을이 왔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다. 방치의 결과로 생긴 외로움이다. 소속감이 부족하고 소외감을 느끼며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아무도 자신을 소외시키거나 왕따 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것 같고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고 친밀감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것은 어린시절 부모와의 관계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인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회피한다. 마음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며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자신의 감정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다섯 살 때 자신의 엄마를 잃은 남자아이가 있다. 엄마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슬픔의 감정은 매우 컸지만 무의식 속에 깊이 억압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의 슬픔에 압도되어 아들의 슬픔을 달래 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 더 문제가 된 것은 엄마의 관심과 돌봄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엄마와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 아이는 대화와 접촉과 놀이와 정서적으로 모두 방치되었다. 그 후 아이는 얼마동안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다. 아버지가 재혼하게 되자 할머니에게 보내진다. 아이는 할머니의 돌봄을 받지만 언제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웠다. 엄마와 아빠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받아주고 달래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석회처럼 굳어져 내면 깊은 곳에 억압되었다.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한다. 그런데,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는 너무나 말이 없었고 감정표현을 못했다. 기쁠 때 기뻐하지 못했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했다. 웃음도, 눈물도 없다. 감정이 메말랐다. 아내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여보, 말 좀 해봐!” 그러나 말이 없다. 그는 아내의 마음에 대해 냉정할 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은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그는 어려서 사랑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상담이나 치유를 받는 사람의 자아상태는 어린아이와 같다. 치유를 위해서는 유아 및 아동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 보울비는 엄마와 애착관계를 형성한 아기가 엄마로부터 떨어질 때 나타내는 분리반응을 3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저항의 단계다. 아기는 분리불안을 느끼며 자신을 두고 떠나는 엄마에게 저항한다. 울고 고함치며 엄마 외의 어떤 대상의 위로도 거부한다. 오직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요구한다. 둘째는 절망의 단계다.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기의 울음소리는 작아지고 저항적인 행동은 철회된다. 아기는 깊은 슬픔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엄마에 대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다. 세째는 이탈 혹은 부인의 단계다. 아기의 슬픔은 억압되고 마치 엄마를 잊은 듯 엄마를 찾지 않는다. 마침내 엄마가 돌아와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엄마의 손길을 거절한다. 정서적인 무반응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이때 아기는 자기를 돌봐주는 다른 사람과 새로운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아기가 이탈상태에서 돌이켜 엄마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는 두 가지의 요인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간이다. 회복에 걸리는 시간은 아기가 엄마와 얼마동안 별거했느냐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하나는 아기에 대한 엄마의 태도다. 얼마나 적극적이며 지속적으로 손을 내밀고 안아주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아기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밀면 아기는 마침내 엄마에게 돌아온다. 이런 아기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방치된 내면아동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랫동안 부모로부터 방치되었던 사람의 내면아동은 상담자의 치유적 돌봄을 거절하고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상담자의 따뜻한 말과 행동을 거부한다. 그러나 상담자는 애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돌봄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마침내 억압된 슬픔이 울음으로 표현되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때까지. 그것은 프란츠 알렉산더가 치유의 기본원칙으로 제시한 교정적 정서체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을 하도록 돕는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방치된 내면아동의 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담자를 향한 상담자의 태도이다. 기법만큼 중요한 것이 태도다. 아무리 거절하고 뿌리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손을 내밀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때 상담자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내와 사랑에 한계를 느낀다. 치유는 영적인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노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아무리 뿌리쳐도 넉넉히 안아줄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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