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한 때 살았던 집은 담도, 울타리도 없는 학교 사택이었습니다. 그곳은 아름드리 상수리 나무로 둘러 싸여 있었고 이 상수리 나무에서 가을이면 몇 자루에 나눠 담을 만큼 많은 열매들이 떨어지곤 합니다. 저는 가끔 그 큰 상수리 나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이 조금마한 상수리 열매에서 비롯되었다니…참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상수리나무가 여린 싹을 파들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무심코 그 싹을 밟아버렸다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나라는 상수리 나무가 주(主)안에서 잘 자라나는 것입니다. 나무에 착 붙어 있어 한 가마니고, 두 가마니이고 잘 익은 열매를 땅위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싹을 틔우지도 못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싹을 틔웠다가 금세 말라버리는, 혹은 다 자랐는데도 결실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상수리 나무는 크지 못하는 것일까요?
영성수련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싶으나 아버지라는 말만해도 입이 막히니 교회 다니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습니다. 더욱이 오랫동안 열등감과 좌절감에 시달려 왔고 자살까지 생각하던 터였습니다. 그는 외가의 도움으로 좋은 직장을 몇 군데나 들어갔지만 한달을 못 채우고 나오곤 했습니다. 직장 상사의 가벼운 꾸중에도 격한 분노를 터트리는 그를 용납해줄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한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유난히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아 온 그에게 아버지는 식구들의 밥상머리에서 베개를 들고 서 있게 했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동생들 앞에서 형으로의 큰 수치를 느낀 그 일이 그의 자아상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음은 물론입니다. 그 후로도 성적표를 받아 오는 날이면 매번 똑같은 일을 겪어야 했던 그로서는 점점 아버지가 두려워졌습니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숨이 막혀오고 점차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너 같은 놈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엄한 직장상사가 아버지 모습으로 비춰지기 시작하면서 윗사람을 병적으로 무서워하고 적대시합니다.
영성수련 과정에서 그는 어린시절로 되돌려졌습니다. 가족의 식탁에서 격리된 채로 서 있던 유년의 자리로 가, 아버지의 표정, 식구들의 표정을 일일이 느껴보라고 하였습니다. 고통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으나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기도 했습니다. 이젠 그가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뜬 아버지였지만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저도 잘하고 싶었는데…왜…” 원망섞인 울음을 울고 우는 그에게 그동안 맺힌 것을 토설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눈을 감고 예수님을 그의 상상의 방에 초대하라고 했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보라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그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방에 들어온 예수님이 그가 들고 있던 베개를 내려 놓으며 가슴 깊이 그를 안아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위로하시며 아버지를 향해 조용히 타이르셨답니다.
“어떻게 아이의 마음에 이같은 응어리를 심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 그는 오랜 세월 가슴을 막고 있던 어떤 응어리가 풀려지면서 온전한 평화를 맛보았다합니다. 이 만남 후 그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한번도 하지 못했던 수요 예배의 대표기도를 자청하고 나선 일입니다.
땅에 묻힌 바위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흙 속에 묻혀 있는 한 씨앗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어린시절 어른들을 도와 산을 일구어 밭을 만드는 일을 할 적이면, 제일 먼저 한 일은 땅 속에 박혀있는 돌들을 골라내는 일이었습니다. 골라내고 골라내고 또 골라내고, 그래서 돌짝 밭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밭도 같습니다. 어린시절 받았던 상처가 깊은 상흔의 바위로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의식 속에 이런 바위가 차지하고 있으면 결실을 맺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정서적 문제의 많은 부분은 과거에 기인한 방어반응으로, 지나치게 남을 공격하는 여성은 자신을 학대하며 구속하였던 아버지와의 다툼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늘 우울함을 느끼는 어떤 사람은 매일 일어나는 부모의 싸움을 보면서 느꼈던 슬픔이 지금도 지속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겨울이란 계절을 유독 싫어하는 어떤 이는 추운겨울 발가벗기운 채 동네를 돌았던 수치스러웠던 감정의 덫을 다시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들은 상처입은 내적아이를 가슴에 품은 채로 겉만 성장한 성인아이인 사람들의 삶을 따라 다니며 두려움과 분노, 부적절함, 고독, 절망과 같은 감정들에 사로잡혀 살게 합니다.
그렇기에 성인아이의 치유에는 오늘의 나를 만들고 나의 삶을 힘들게 하는 바위를 찾아내고, 부수고, 골라내는 일이 우선적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힘든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가 팔자나 운명입니다. 그러나 팔자와 운명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내가 삶을 이끌어나가는 방식입니다. 거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거미줄에 얽혀 자신의 삶을 지탱하듯이 우리 또한 내가 이끌어가는 삶의 항로에 따라 삶을 이끌어갑니다. 그러기에 내 삶의 항로를 아는 것, 내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부정적인 삶의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 치유의 가장 중요한 걸음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 대해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혹은 어떤 감정에 대해 왜 그런 식으로 느끼는가를 아는 것은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전을 의미합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자신을 계속 숨기면 숨기려 할수록 누르면 누를수록 자신의 존재를 표출하려 하기에 이 내면아이의 인정받지 못한 슬픔을 끌어안고 동참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대부분이 어려운 상황에 임하는 어린시절의 반응에서 유발되었다는 것을 거듭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어릴 적에는 할 수 없었던 반응들을 성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가 주는 영향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는 성인아이의 치유 작업은 참으로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습관들은 매우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성인아이가 된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치유 또한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매년 밭고랑을 갈아 엎는 땀을 흘리듯 우리도 깊이 묻힌 바위를 찾아내고 들어내고, 또한 자잘한 돌들을 골라내는 수고를 간단없이 할 때, 내 안의 상수리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좋은 땅을 만나겠지요.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나, 그러나 이 일은 막막하기만 한 외로운 작업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그 누군가와 함께 하는, 무엇보다 우리의 하늘 아바와 함께 하는 날로날로 새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커져버린 작은 어린아이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작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분이 자신을 내어주며 우리의 아직 끝나지 않은 치유여행에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부분을 만지시고 고치시며 회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이 올 한해도 별 수확 없는 상수리나무와 같아 마음이 아련한 우리 인생들이, 내일을 기약하며 걸어볼 위로이자 희망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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