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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순] 또 다른 감성훈련, 춤 쎄라피 | Dance Therapy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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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감성훈련, 춤 쎄라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여러 심리 기법 중에 춤을 통한 방법이 있다. 춤 세라피(dance therapy)가 그것이다. 유학생활 중, 한국의 온 여성들이 정신대 문제로 떠들썩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오는 것을 느꼈지만, 느낌이 오는 만큼 무력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들 앞에서 죽기 전에 고백을 하고 싶었다는 어떤 할머니의 증언의 글 앞에서는 나의 무력감(helplessness)은 더해만 갔다. 수업 시간에 미국 사람들이 자기네 짧은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그렇듯 소중하게 얘기할 때, 내 안에서 오는 소리는 “야, 년놈들아! 내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얼마나 기가 막힌 역사를 가진 후손인지 알기나 하냐? 내가 누군지 역사 짧은 너희들이 어찌 알랴!” 그래 봐야 그것은 내 안의 소리일 뿐, 어떤 식으로든 제 통로를 찾지 못한 채 울음만 삼킬 뿐이었다. 나는 한국여성으로서의 내 배경에 대해 설명조의 말보다는 ‘자기표현’이 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몇날 며칠을 운전대를 잡고서 혼자 영어를 중얼거려 보는데, 어떻게든 수업시간에 내 표현을 해보리라 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한국 유학생 언니가 내게 춤으로 한번 그 표현을 해보지 하는 권유를 한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뭔가 접촉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나는 학교 예배 담당자에게 5분만 내게 할애해 줄 것을 부탁했다. “Let My Sisters Be Visible!"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들어와 살기로 작정한 정신대 여성의 한 많은 세월과 비전을 춤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든지 간에 내 안의 울음은 멈추었다. 그러더니 무기력하던 느낌도 멈추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춤이 가진 치유의 본성을 온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춤 치유란 언어가 아닌 몸의 움직임과 춤을 통하여 각 개인의 내면세계를 외부세계로 표출시킴으로 치유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다. 겉으로 표현한 인간의 제스츄어나 반응보다는 내면 안에 감추어 있는 진정한 움직임을 파악하여 그 사람의 감정이나 패턴적 관계방식, 그리고 그 사람의 소망하는 바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춤을 통한 치유성이란 강박관념으로부터의 정리된 마음, 억압되어 있거나 혹은 혼동된 사고로부터의 탈출이나 평정된 마음가짐을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의성을 통해 내면의 깊은 것을 표현시켜 심리치료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치료는 결과론적 시각보다는 과정적 시각이 중요하다 하겠다.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고유함이나 독특함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세계의 어떠함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과 춤의 강도를 통해 동작을 변화해가는 그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의 표현의 변화의 과정에 숨어있는 내면세계의 역동성 파악이 치료를 위한 직관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춤을 통해 개인의 동작의 크기와 강도, 공간적 경로, 역동 면에서의 지속적인 느림이나 동작의 가속, 행동의 주기 등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즉, 빠른 몸짓, 머리를 흔들거나 발바닥을 치는 동작, 강조해야 할 것의 드러남, 혹은 공간을 활용하는 일, 방향을 갖는 일 등은 춤의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드러난다. 춤의 역동적 색체는 그 연함과 강함, 혹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어떤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적절하게 창의적으로 자기 내면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유자 (therapist)가 춤을 추는 사람에게 안전성 (safety)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치유자에게서 안전함을 느끼게 될 때에야 (신뢰감 형성) 춤추는 사람은 비로소 안정된 (stable) 자기표현을 몸을 통해 자유롭게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춤치유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성폭력 피해자나 가정폭력 피해자이다.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가정폭력 conference에서 본, 춤치유를 통해 자아상이 바뀐, 피해자들의 춤을 통한 자기선언은 참으로 놀라웠다. 아직 survival 도상 중에 있는 여성의 경우에도, 피해자로서의 분노를 ‘북소리’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그 의지의 결연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dance therap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들과의만남에서 오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었다. 딱히 상담가로 조언이나 객관적인 정보를 주는 것조차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물론 언어치료를 통해 자아개념을 향상시키는 것과 관계의 기술, 만족스럽지 않은 삶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 또한 가슴 아픈 기억을 극복하는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춤치유는 몸을 사용해 몸과 내면과의 부정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도록 도와준다. psycho-physical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정신적인 그리고 신체적 수준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며, 육체가 정신을 입고 있고, 정신이 몸을 입고 있는 복잡한 영향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춤치유를 통해 상처를 입은 사람은 기능하지 못하는 몸의 어떤 부분에 긴장을 풀고, 동작의 습관을 바꾸고, 몸의 자연적인 능력을 회복시키는 도움을 받게 된다. 몸을 회복시키는 것은 정신-신체적 건강을 회복시키는 본질적인 것이다. 어떤 기본 동작이나 테크닉을 먼저 가르쳐주지 않고, 춤추는 사람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 상상력을 통해 마음껏 몸의 움직임에 내맡김으로써 얻어지는 창의성을 발휘케 한다.

특별히 외상적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춤치유는 그의 제한되고 억제된 상상, 환상, 심상의 사용을 자극하는 경험을 중요시 여긴다. 폭풍우의 강렬함, 야생 동물의 공격성, 파도의 밀려오는 힘, 원시적인 밀림의 야수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울음소리 등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가슴 아픈 문제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두지 않고, 느낌과 몸 상태의 범위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내담자의 방어기제를 이완시키고 자신의 신체적 자율성을 키워줌으로 피해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주제인 수치심, 죄책감, 발달적인 문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 상처를 극복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치유라는 측면에서, dance therapy의 의미도 있지만, 나는 이 기법을 또 다른 감성훈련이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의 성격 유형별로 (장, 가슴, 머리형) 주요 감정 기제가 분노, 불안, 두려움 등으로 크게 나뉘어 지듯이, 춤추는 사람에 따라 그 춤의 패턴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같은 음악이라도 타악기가 들어간 부분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멜로디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딱히 나누어 듣는 것이 아니라, 한 음악 안에 흐르는 리듬 중에도 아래서 받쳐주는 북 소리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소리가 있다고 알아차리지 못한 채 멜로디 부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로메로”라는 음악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음악에는 북소리가 규칙적으로 똑같은 패턴으로 계속된 가운데, 마치 그 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멜로디 소리가 북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압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유형의 사람들은 낮게 흐르는 반복적인 타악기 소리를 알아차린다. 또 어떤 그룹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멜로디 부분을 따라 읊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춤을 추는 경우에 있어서도, 같은 느린 음악이라도 어떤 사람은 곡선을 그리며 음악을 따라 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직선을 그리며 몸짓을 한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곡선을 빠르게 느리게 하거나, 직선을 그 속도로 그려나가면서 패턴화하는 것이다.

패턴화된 성격에서 취약성이 나타나듯이- 예를 들어 장유형의 사람은 분노에 취약하고, 가슴유형의 사람은 불안이나 걱정 부분에서 항상 문제를 안고 살듯이- 패턴화된 몸동작도 더 풍성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몸동작을 방해한다. 자기가 어떻게 규칙적으로 혹은 반복하여 몸놀림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몸의 쓰임을 더 화려하게 혹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춤출 때, 손과 엉덩이만 흔들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이 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한번쯤은 몸통부분, 발바닥 부분, 등 부분도 의식하면서 그 부분을 약간이라도 활용해 본다면, 이때까지 습관적으로 움직였던 것에서 훨씬 더 자기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혼자 춰보는 것에서, 둘이서, 여럿이서 춰보는 역학이 다르듯이 자기 몸의 구석구석을 느끼며 의식하며 춤을 추어볼 때, 말로 표현한 것 이상의 ‘자기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음치가 있듯이 몸치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문화 자체가 어쩌면 너무나 많은 몸치를 만드는지 모르다.

노래를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고, 말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됨을 알려주는 양 하지만, 왠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대중가요의 back dancer나 하는 일처럼 생각하니 말이다. 자기 몸 구석구석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 말로 그 몸속에 있는 내면의 말을 진정으로 듣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로 표현 안 되는 감성을 깨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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