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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순] 가정폭력과 상담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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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과 상담

내가 처음 학교 (McCormick Seminary)로부터 목회상담 실습장소를 KANWIN (시카고 여성핫라인)으로 제의 받았을 때, 그리고 그곳이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다루는 사회기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일 년 동안 인턴으로 훈련 받아야 하는 곳이 하필 ‘폭력’이 붙은 센터란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어떤 여자들이 맞고 사는 거야 하는 생각부터 앞섰다.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추천한 교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기관 주소가 P. O. BOX로 되어 있는 이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보통 사회봉사기관의 이름과 주소는 공개되어 있는데 반해, 이 기관의 주소는 공개되지 않았고 심지어 신문기자조차도 방문 허락이 안 되던 곳이었다. 내담자의 ‘안전’을 위해 센터 자체를 폐쇄하여 운영하던 때였다. 나는 이곳에서 유학생활 10년 중 7년을 보냈다. 인턴 훈련 이후 자원봉사에서부터 상임이사가 되기까지, 시카고 여성 핫라인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하게 한 곳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맞고 사는 거야?”라고 말하며 살았을 때는 정말이지 내 주변에 매 맞는 여자가 없었다. 정말 없었을까?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직접 내지 않았다 해도, 나의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태도는 마치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고, 그렇게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 받아 싸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나에게 어떤 여성이, 그것도 남편에게 오랫동안 학대를 받아온 사람이, 자기의 어려움을 나누려고 했겠는가? 이처럼 내게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다.

흔히 가족폭력의 범주에 대해 말할 때, 부부나 혹은 부모와 자녀관계에만 해당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가족 구성원이란 배우자, 전배우자, 사실혼 관계에 있는 자,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와 기타 동거하는 친족관계와 연애관계, 그리고 친척관계를 포함한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한 사람이 다른 상대방을 지배하고, 그에게 힘 (power)을 행사하기 위해 신체적 또는 심리적 학대를 가하고, 위협하고, 협박하며, 고립시키거나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양식을 가정폭력이라고 한다. 가정폭력은 이러한 폭력을 잘못으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태도, 제도, 법에 의해 계속적으로 유지된다. 1983년,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전화”만이 가정폭력이 집안문제가 아닌 사회문제이고 범죄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을 끌어내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1987년, 피해자를 위한 쉼터가 만들어졌고, 90년 이후부터야 학자들이나 연구기관, 사회복지기관이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8년 “가족폭력특례법”(가정폭력이 더 이상 사생활 문제가 아니고 국가가 개입하여 해결하여야 할 공적문제이며 범죄라는 인식전제)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아내구타나 학대가 ‘소리 없는 범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사회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통념들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념들이란 무엇인가? a) 가정폭력은 부부싸움이 아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기 때문에 남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가정폭력은 일방적인 폭행으로 치명적인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인 황폐화를 야기한다. b)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다? 가해자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이유 없이 폭력을 일삼는다. 설혹 상대방에게 결점이 있다 해도 그것이 매 맞을 이유가 될 수 없다. c) 내 마누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북어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한다.’ 혹은 ‘아내가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고쳐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아내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 d) 자식이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사회는 아이들에 대한 체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당화 해왔다. 교육의 매, 사랑의 매라는 이름아래 폭력이 난무했던 때가 있었다. e) 가해자는 정신병자나 알코올 중독자이다? 알코올은 단지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에게 자신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정당화와 변명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며, 매 맞는 아내에게 술만 아니면 남편의 폭력은 중단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한다. f) 가정폭력은 가난한 집에서 많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폭력은 계층이나 지위와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를 위한 쉼터의 통계자료에서는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계층에서나 발생된다고 나타났다. g) 맞고 사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피해자는 반복되는 폭력으로 공포와 좌절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피해자의 행동양상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반복된 구타의 결과이지 원인은 결코 아니다. h) 집 안 일이니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집 안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통념은 가정폭력을 방치하고 은폐시켜 왔다.

아내구타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하여 행위자가 자신의 힘 (power)을 남용 (abuse)하는 것이다. 그어떤 것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지만 폭력 행위를 선택 가능하게 하는 부수적인 다음 몇 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a) 가족에서의 모델링이 그것이다. 집에서 아이들이 폭력을 목격했을 때 아이들은 폭력을 허용된 행위로 믿는다. 부모로부터 아이들은 “나에게 상처 (불편이나 피해)를 주는 사람은 때려도 된다.”라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듣는다. b) 긍정적 강화로서의 폭력이다. 폭력행위가 부정적 결과 (예를 들어, 배우자의 가출,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 감옥 혹은 별거)없이 긍정적 보상만 준다면 폭력의 재 시도는 쉽게 이루어 질 것이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는데, 남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성관계를 더 성의있게 해주거나, 잘못했다고 빌면서 밥상을 더 풍성하게 차려주는 것은,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시켜주는 행위이고 그것을 더 강화시켜도 좋다는 암묵적인 긍정으로 결과지어질 때가 많다. c) 폭력에 대한 우리의 법과 사회의 메시지이다. 일반 범죄와 비교하여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로 다루지 않는다. d) 미디어, 교육, 종교기관, 제도, 법, 문화 등을 통해 우리는 사회화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
을 부추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성역할의 규범을 학습한다. 또한 우리의 사회 권력구조(경찰, 법, 관례)가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남성을 선호하고 힘이 없는 여성을 소홀히 한다. e) 감정표현 기술의 부족이다. 행위자들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부부관계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또한 폭력 남편들은 자기 내면의 섬세한 감정을 읽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으로 모든 감정을 포장한다. 그리하여 폭력적인 남편은 종종 분노(감정)와 폭력(행동)을 차별화하지 못하고 연관시켜서, 폭력 없이 화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f) 스트레스와 폭력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많은 남성들은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기 위해, 또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흠잡을 만한 사건’을 찾는다.

요는 폭력에 대한 상담가의 시각이 중요하다. 즉, 폭력은 학습된 행동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성장한 가정, 미디어, 사회 등에서 전하는 메시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도 된다.)에 의해 학습된 행동이다. 또한 폭력은 선택된 행동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행위자가 선택한 행동이다. 분노를 반드시 폭력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힘과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 강압은 외적인 통제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부모 있는 데서만 공부하는 체 한다거나, 아내자신은 원치 않아도 성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외부적 통제에 지나지 않지, 실제로 아내의 마음과 사랑까지 통제되어서 나오는 순응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폭력은 교정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행위자는 폭력이 아닌 다른 행동들을 선택할 수 있다. 폭력은 남자와 여자 (혹은 어른과 아이)의 불평등한 power 관계의 결과이다.

음주와 약물복용이 폭력의 근본원인은 아니다.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은 폭력행동과 분리시켜서 다루어야 한다. 부부갈등, 직장문제, 성적인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문제가 폭력의 근본 원인은 아니며, 이러한 요소들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피해자들의 “왜 이런 일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는가, 왜 하나님께서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셨는가, 이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고통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몸부림이며 영적인 질문들이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오용은 가정폭력 피해자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스스로를 탓하고, 고통을 겪도록 상당한 기여를 한다. 피해자들이 고통 하는 경험에 대해 가해자들은 종교적 전통을 사용하여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며 핑계대고, 합리화한다.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매주 매일 예배에 충실 하라, 철야예배를 언제까지 하라, 아침금식을 얼마간 하라, 더 열심히 기도해라.” 등의 조언이나 충고가 인생의 질문에 대해 단순하고도 완전한 해답들로서 제시될 때, 단순함에 대한 환상이 생긴다. 즉, 고통에 대해 의지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공식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그런데 고통 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형태의 고통도 하나님의 처벌이나, 혹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해주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 괴로운 경험들이 일으키는 질문과 기꺼이 씨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상담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고통의 경험 (왜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을 ‘원인-결과 관계 시각’에서 응답하는 사람 (예. 남편의 학대는 내가 17세 때 어떤 남자와 관계가졌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자신의 괴로움을 오래전에 있었던, 자신이 죄의식을 느껴왔던 사건에 대한 정당한 처벌로 여겨, 결과 (남편의 학대)와 이유(십대시절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본질 (남편의 학대)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어 자기 고통에 대한 책임소재(학대하는 남편)를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 가르침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곳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임마누엘 (시편 22:55)하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파트너의 학대를 도발하지 않도록 여성에게 행동을 바꾸라고 격려하지만, 그녀 행동의 변화가 어떤 것이든 그가 학대를 그만두는 결정요인이 되지 못한다. 수 천 년을 내려온 가부장제의 문화, 제도, 관습이 가진 힘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구타자의 폭력이 노출되지 않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개선’에 초점 맞추는 가족체계 이론적 접근이나, 폭력 남편이 자기의 폭력과, 그리고 자기가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의식을 가진 상태에서는 부부상담이 고려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부부상담과 가족치료는 가해자가 자기 폭력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폭력을 자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내가 남편의 폭력에 대하여 책임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 그 효과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치료 효과가 있는’ 중재는 가해자의 ‘체포’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법적인 제재가 없이는 폭력이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정폭력법”의 실제적 시행(enforcement)에서부터 우리의 건강한 가정문화가 만들어 진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인격을 존중하는 고상한 문화가 서구 유럽에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법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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