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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우리의 문제보다 크신 분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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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를 어떻게 사나? 아침에 눈을 뜬 여자는 창살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햇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집안은 여기저기 어지러져 전쟁터를 방불케하나 그녀는 손하나 까닥할 기력이 없는 듯 초점없는 눈초리로 마냥 벽면만을 보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사는 것이 너무 벅차고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자신들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 항상 억눌려 살고 있기에 숨이 콱콱 막힐 것만 같기도 하고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우리네 대부분은 생활이 힘들고 갈등이 있다보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한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어느 상황에 일시적으로 품을 수 있는 감정인 반면에 이러한 정서가 매일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주된 정서일 경우에는 우울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겪는 증상들이 구약의 욥기에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구나”-<불면증>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비관주의>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삶이 무가치하게 보임>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무력감>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육체의 탈진>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죽음에 대한 충동>

불행은 외발로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리고. 자식들은 몰살당하고 자신은 기왓장으로 잠시라도 몸을 긁지 않으면 안되는 병에 걸린 처참한 삶의 자리에서 욥은 갖가지 이상 증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겪는 이러한 증상들을 현대인들은 우울증이란 병명을 붙입니다.

정서적 죽음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이 우울증,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우울증의 원인은 풀리지 않고 축적된 분노의 앙금이 주요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이 용납되지 않는 가정이나 학교, 또는 교회에서 살아왔기에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쌓인 감정을 어떤 용납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은 비교적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어디에서도 자신의 축적된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울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상하질서와 명령이 분명한 군대에서 우울증이 많이 생겼고 또한 엄격한 학교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학생들이나, 그리고 가부장제도의 틀 속에서 멍에를 삭혀야 했던 여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풀리기를 기다리는 어떤 응어리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 응어리가 풀려지지 못하고 고여서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렇기에 우울증은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향해서 발산되어야 할 분노가 자신을 향해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결국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내부로 향한 분노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울증의 유발요인은 학습된 무기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석에 몰린 두 마리의 쥐에 대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우울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과학자들은 두 마리의 쥐를 칸막이가 있는 통속에 넣고 왼쪽 벽에 쳇바퀴를 달아놓았습니다. 왼쪽 쥐에게만 바퀴를 돌릴 수 있게 해준 것이지요. 그리고는 두 마리의 쥐에게 동일한 전기쇼크를 가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쥐가 쳇바퀴를 돌리게 되면 쇼크를 중단하게 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같은 시간동안 동일한 쇼크가 두 마리의 쥐에게 가해졌지만 오로지 오른쪽 쥐만 우울증상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쇼크가 주어졌는데 왜 오른 쪽 쥐만 우울증상을 보이는 걸까요? 그것은 오른 쪽 쥐는 상황에 대해 무기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쥐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전기 쇼크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결과적으로 쥐는 먹기를 그치고 축 늘어지더니 주변환경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왼쪽에 있었던 쥐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쳇바퀴를 돌리면 고통이 멈춘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 것입니다. 곧, 고통이 삶 가운데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계속될는지는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과학자들이 우울증에 걸린 오른쪽 쥐를 왼쪽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제는 오른 쪽 쥐에게도 쳇바퀴를 돌리면 고통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울증에 걸린 쥐는 쇼크가 와도 바퀴를 돌리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쥐는 고통 가운데 망연히 있는 체 다만 아파하기만 합니다. 삶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어줬어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자포자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많은 통찰력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쥐가 들어있던 통 속과 같았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내가 어찌 한다고 상황이 변하지 않는, 그래서 무기력한 심사로 내버려두었던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상처가 되었고, 그 경험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갑니다. 지금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통 속에 여전히 갇혀 있어 어떠한 노력도 포기해버립니다.

저는 많은 상담을 하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살아온 그 여정이 어쩌면 그토록 아프고 힘겨운 일들이 많은지 사람들의 상처에 압도될 때가 있습니다. 어찌 살아왔을고? 그들의 삶의 무게에,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안의 의구심이 들 때마다 제가 상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끝이 아닌 것처럼, 절망이 우리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뒤에 말하고 싶은 것은 부활의 환희이며, 절망의 끝 자락에서 다시 동터오는 희망을 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될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3:2절에서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절망을 토로하지만 여기에서 그의 고백이 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절망의 노래 끝에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다함이 없는 사랑)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며 힘찬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설 수 있었던 비결이며 또한 우리 삶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론 하나님의 손길을 의심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욥 또한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절망적 상황과의 씨름에서 결국은 이전보다 더욱 더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우울증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더욱 잘 말해줍니다. 엘리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누구보다 통 큰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살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와의 한바탕 사력을 다한 싸움을 한 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벼른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적, 육체적 탈진에 빠졌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의 상황은 참 암담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이 없는 듯한, 어쩌면 이 세상에 자신만이 홀로 있는 것 같은 깊은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것을 현실로 여기고 낙심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가르쳐준 현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의 편에 선, 그리고 엘리야의 편에 선 수천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영적, 육체적 탈진이 있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비관적으로만 보는 정서적 밀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주 가망없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판단의 폭이 좁아진 엘리야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잘못된 시각과 감정에서 이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도 암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결코 감당키 어려운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어려움과 상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자신에게 상기시켜주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가진 문제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분이 당신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신다는 믿음의 눈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 욥, 엘리야로 이어지는 승리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도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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