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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죽음 너머 세상을 보는 눈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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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너머 세상을 보는 눈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그가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진실되고 충성되게 했는가에 마지막 임종을 맞이할 때 알 수 있다. 교회의 장로이면서 유명한 의과대학의 교수였던 한 의사가 동료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를 받았다.

선생님도 의사이시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길어야 2년밖에 사실 수 없겠습니다.

이때 그 의학 교수는, 2년이면 주님을 위해서 아직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군요. 라며 조용히 미소지었다고 한다. 죽음에 임하여 아무나 이런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때 나의 조카딸은 전남대 병원에서 수간호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피투성이 환자들을 간호해야 했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과도한 출혈로 인하여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유난히 잘 생긴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도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새러 나왔다.

저렇게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 죽어가다니

그때 청년이, 젊어서 죽는 것은 하나도 원통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의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지요.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죽음은 가진 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누구나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죽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절대로 죽지 않아. 라면서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마지막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나는 안 죽어, 안 죽어 하면서 죽어 간다. 원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죽어. 내가 교회를 안 나갔어. 감사헌금을 안 냈어. 할 것 다 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하면서 원망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도 한다. 아내가 제대로 수발을 못해서, 또는 남편이 너무 속을 썩여서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한 번만 봐 주시면 지금까지 십일조 안 낸 것 다 내고, 주일도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하며 애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저런 사정 다 들어주시면 세상에 죽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회개시키지 위해 죽음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6,25 전쟁 때 중공군에 포위 당해 죽게 된 한 군인이, 하나님, 여기서 저를 살려 주시면 앞으로 하나님께 저를 바치겠습니다. 라고 서약했다. 그리고서 중공군이 쫙 깔린 25리를 정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신학교를 나와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기가 죽고 혼이 나가 버리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절망감과 우울증으로 지레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절망감과 우울증으로 지레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8개월 후에 죽을 것이라는 의사에 말에 겁을 먹고 아예 3개월도 못 살고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죽음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들은 이제 주님께 가오니 받아 주소서 라는 기도를 드릴 줄 안다. 이런 사람은 임종의 순간에도 소망과 빛을 본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마지막으로 만나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빈부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온다. 진실한 신앙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두려움 없이 맞이하게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스데반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성 밖으로 끌려나가 공개처형을 당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어린 돌에 맞아 죽었다.

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그들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 솟구쳐올랐다.

아,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는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천국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주님이 안타까운 듯 그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의 육신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죽음이 그의 목전에 와 있었다. 그러나 어떤 불안이나 공포도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평화롭게 미소지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리 행하는 것이오니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참으로 죽음 앞에서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볼 줄 알았던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였다. 이러한 스데반에게서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을 발견하는 것이다.

대원군 시대에 절두산에서 순교한 1만 2천 명의 우리 나라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8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은 스데반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땅에 던져 밟기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던지는 대신 자기의 목숨을 던졌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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