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칼럼

교수논단

게시판 읽기
[정태기] 네 가지 언어

chci

  • 조회수8,175

네 가지 언어

어느 초등학교 학생이 목사님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글이다.

우리 엄마는 목사님이시다. 교회에서 설교를 해서 목사님이 아니라 잔소리가 많아서 목사님이시다. 내가 잘못을 하면 엄마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리고 잊혀질 만하면 또 이야기한다. 그것도 부족해서 아빠가 밖에서 돌아오시면 잊지 않고 꼭꼭 일러바치신다. 이렇게 엄마가 잔소리를 하면 나에게 좋은 변화가 일어나야 할 텐데 엄마가 잔소리를 하면 짜증이 나고, 잔소리가 계속되면 화가 나고 그래도 잔소리가 더 계속되면 집을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산다. 그러나 엄마가 없는 것처럼 외롭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우리 엄마가 한 번만 말씀을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아이는 엄마의 잔소리를 목사의 설교에 비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지루한 말을 늘어 놓고 있으면. 설교 그만해! 라며 받아쳐 버린다.

사람의 말은 일반적으로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입술의 언어인 잔소리, 머리의 언어인 지식의 말, 가슴의 언어인 기분의 말, 그리고 혼의 말이 있다. 이 중 입술의 언어인 잔소리는생명력이 없는 언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을 닫아 버리게 하는 말이다. 감정 내키는 대로 내뱉는 것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줌은 물론 인간의 성장을 가로막고 퇴보시킨다.

잠언 기자는 부드러운 말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고 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중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도 이런 잔소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다. 학교 선생님들도 종종 이런 잔소리꾼에 해당된다. 부모님들의 대표적인 잔소리로는 텔레비전 보지 말고 공부해라. 그만 놀고 공부해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잔소리를 듣고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아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이들이 잔소리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그렇게 하는 척일 뿐이다. 이런 잔소리는 아이들을 눈치나 슬슬 보는 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잔소리는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자아상의 그릇을 위축시키는 작용을 한다. 잔소리를 지나치게 많이 듣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불안과 공포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머리의 말 역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언어는 아니다. 지식과 정보의 언어는 감정과 혼의 언어와 어울릴 때에만 인간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요즘 학교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어지는 언어는 메마른 머리의 말이다. 이런 지식과 정보의 말만을 듣고 공부하는 아이들의 인격이 변화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나라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간적 성숙도는 아직 미숙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머리만 큰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야말로 교육의 위기인것이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사는 장사치들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지식의 언어이다. 곧, 정보의 언어, 머리의 언어인 것이다. 이런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문을 열게 하는 말이 있다. 꿀송이처럼 달아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생명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언어가 있다. 성경에서도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쑤시는 뼈를 낫게 하여 준다고 했다. 가슴의 언어라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가슴의 언어는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하는 언어이다. 사람은 말을 할 때 자신의 기분대로 말을 하게 된다.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 말에 해당하는 감정, 색깔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때 타인의 색깔을 인정하는 가슴의 언어에는 조건이 있다. 즉,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가 이쪽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면 마음의 문이 자동적으로 열린다. 마음문이 열리는 순간 타인의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부모는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해 주기를 원한다. 선생은 학생을 잘 지도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방의 굳은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닫힌 마음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닫혀진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없다. 얼어붙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에라야 상대방의 마음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MIT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장난꾸러기요, 말성꾸러기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그는 어쩌다 산수 시험에서 90점을 받았다.

물론 그 아이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산수 시험지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펼쳐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기쁨에 차서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주던 아이의 어머니가 산수 시험지를 펄럭거리며 유난히 어깨를 편 아들을 보고 물었다.

그게 뭐니?

아이는 시치미를 떼면서 시험지를 내보였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가슴이 신나고 기쁜 감정으로 넘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때 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해 주고 함께 해주는 것이 가슴의 언어의 특징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아이고 우리 아들 얼마나 신나, 엄마가 이렇게 신나고 좋은데. 라며 칭찬해 주었다. 아들의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부모로부터 끊임없이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언어, 아이의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언어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마침내 세계적인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그때 그의 어머니가 아이의 기분을 묵살하는 언어를 썼거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면 아이는 자신에 대한 긍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성장의 도약도 없었을 것이다. 이같이 가슴의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강력한 언어가 있다. 바로 혼의 언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의 존재자이다. 인간은 입으로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혼으로도 의사를 전달하는 존재이다. 혼은 우리의 전 존재를 통해 말을 한다. 혼은 얼굴, 손, 몸 전체를 통해서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전달한다.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 건성으로 손을 내맡긴다는 느낌이 들면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상대방이 내내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미 상대방의 마음이 내게서 떠나버린 것이다. 그때 영은 한 없는 배반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면 자신이 그에게 의미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가 살며시 몸을 기대어 오면 그에 대하여 막연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혼의 교류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혼의 교류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혼의 언어의 적절한 사용은 서로의 사랑을 키워 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 언어는 순간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게시판 목록이동
이전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다음글 예수를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