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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해가 지면 돌아가는 집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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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돌아가는 집

한 노인이 임진각 가까이에서 북쪽을 향해 높이높이 연을 띄우는 모습이 보인다. 노인은 거의 50년 동안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실어 매년 북으로 연을 띄워 보냈다고 한다. 몇 년 전 TV에 방영된 사할린 거주 한국 노인들의 모습은 비참했다. 그들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북해도에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북해도가 소련 점령지가 되는 바람에 그들은 소련 국민으로 귀화하든가 무국적자로 남을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무국적자로 남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무국적자로 남았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청청하던 젊은이들은 백발 노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들은 흐물어진 잇몸 사이로 한결같이 고향이야기를 되뇌었다. 뼈라도 고향 산천의 흙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에 묻히고 싶어했다.

대체 고향이 무엇이기에 이들의 마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고향은 분명 마음을 사로잡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는지도 모른다. 고향은 이렇듯 우리 인류의 마음에 신비한 힘을 주는 장소이다.

마음의 생기가 죽어 버리면 육체도 따라 시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으면 육체도 함께 살아나게 된다.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명상훈련법에 고향 상상법이란 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효과가 증대된다. 드볼작의 신세계 교향곡 제2악장은 이때 안성맞춤의 곡이다. 이 곡은 드볼작이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며 미국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신세계 교향곡 제2악장에서 흘러나오는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의 아름다운 선율은 우리를 고향의 뒷동산으로 달려가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향의 산천은 다른 데서 보는 산천과는 다른 힘을 준다. 고향은 우리 마음속에 우뚝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과 같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솜옷과도 같다. 일생을 살면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지워버려도 고향이라는 든든한 추억의 언덕은 잊어버릴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다.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 다니는 벗이다.

전세계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2000년이 지난후에 다시 모여 한 국가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마음속에 돌아갈 고향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고향이 살아 있는 사람은 힘을 잃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더운 사하라의 사막, 중도에 가서도 남다른 투지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기다리는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있는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오곡 백과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백인들의 온갖 학대에 시달려야 했던 흑인들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을 꿈꾸었다.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위대한 인물들은 마음에 아름다운 고향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고향은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의 마음의 크기, 깊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마음의 언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잠언 27장 8절은,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을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 와 같다고 했다. 탕자도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자기가 나소 자란 고향집과 부모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기대고 일어설 수 있는 큰 언덕이었다. 처참한 삶의 환경에 놓여 있을 때 돌아갈 고향이 없었더라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먼 타향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고생했다. 그가 극도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조상의 땅 고향으로 돌아가라. 언제나 너와 함께하겠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곳이라 해도 고향은 자신의 삶이 배어있는 곳이다.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겨운 곳이다. 애굽의 땅에서 기름진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들의 고향은 가나안 복지였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에서 포로로, 노예로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향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스라엘 땅이다. 언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 땅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었다. 신양에서의 마음의 고향은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이다.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고향은 부모가 자식을 기다리는 곳이다.

성경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엄청난 시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부모가 있는 고향을 다시 찾는 사람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즐거움이 있다. 탕자는 바로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인간은 절반의 삶밖에 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힘이 없다. 끊인없이 솟구치는 생명력이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영이 있다.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마음속에 숨은 고향을 찾는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이 거기에 있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그 곳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외롭고 쓸쓸하게, 혹은 병든 채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말한다. 탕자는 출세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한아름 가지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을 가졌을 뿐이다.

실패자로 가도 나를 품어 안아 주시는 분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다. 이런 마음의 고향은 구체적인 어떤 장소가 아니다. 어디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았음으로 믿음의 조상, 즉 믿는 자들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다니엘은 고향을 떠나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야 했지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진정한 고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어느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가자 아이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운동장 한 구석에 어둠이 사위를 둘로쌀 때까지 한 아이가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가던 선생님이 물었다.

얘야, 너는 왜 여기 홀로 서 있니?

아이는 힘없이 대답했다.

저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아이는 고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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