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칼럼

교수논단

게시판 읽기
[정태기] 영원한 만남

chci

  • 조회수6,990

영원한 만남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기쁨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마음에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나는 70년대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7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서 미국에서 혼자 공부한 적이 있다. 고국에서는 두 딸과 아내가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초 1~2년 계획하고 떠난 공부가 쉽게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족들이 매년 비자 신청을 해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유학생 가족 비자를 거의 내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동료 학생들이 기도 운동을 시작했다. 신학생 전체가 정태기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자는 중보기도 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흑인 학생이 나를 찾아와서는, 어제 기도하던 중 당신 아내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는 환상을 보았네.라고 말해 주었다. 그의 말을 미친 소리쯤으로 치부해 버리긴 했지만, 만약 내 아내가 죽는다면.. 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머릿속에선 거센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 날 저녁 기숙사 천장에 아내의 얼굴이 크게 어른거렸다. 불을 꺼도 아내의 얼굴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었다. 남편도 없이 자식들을 키우며 고생한 아내가 가여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식당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아내는 수시로 나타나 사라지지 않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나 하나 믿고 살아온 아내 생각에 목놓아 울었다. 교통 경관이 다가와 병원에 가자고 할 정도였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아내와 나는 성격 차이로 많이 싸우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니 아내의 자리가 너무 커 보이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기도 운동의 힘으로 가족들은 7년 만에 미국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가족이 도착하는 날, LA 공항에 나가 기다리는 시간이 지난 7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아내가 커다란 트렁크를 밀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걸어 나왔다. 내가 떠나올 때 불과 두 살이던 막내는 아홉 살, 다섯 살이던 딸아이는 열두살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때의 만남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붙잡고 감격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경에는 탕자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리운 사람들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종정 나타난다. 어린 소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지 수십년 만에 애굽의 재상이 되어 그리운 가족과 만나는 장면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생명의 활기를 느낀다. 그래서 그 만남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소중한 재산이다. 그러나 아무리 극적인 만남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종말이 있다. 언젠가는 인연의 끈을 중단하고 떠나야 할 때가 온다. 나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 그들과도 만남이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이별을 뛰어넘는 만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만남이다. 그 만남만이 영원한 만남이다. 그 만남은 하나님 안에서 이별이라는 한계성을 뛰어넘어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진다.

게시판 목록이동
이전글 해가 지면 돌아가는 집
다음글 사랑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