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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모] 치유된 감정, 변하는 인생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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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된 감정, 변하는 인생

일본에서 전해오는 옛 이야기 중의 한 토막이다. 툭하면 사람들에게 싸움을 거는 한 사무라이가 한 선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도대체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소. 좀 설명 좀 해주겠소?

이런 무정한 놈 같으니라고, 너 같은 부류하고는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어. 선사는 쌀쌀하게 대꾸하였다.무엇이라고? 단칼로 베어버리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무라이는 칼을 빼들었다.

그게 지옥이니라.

선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그러자 이 사무라이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자신도 감정을 추스리고, 칼을 다시 칼집에 넣은 다음,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귀한 통찰을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요.

이번에도 선사는 조용하게 사무라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누군들 천국을 원하지 않으랴. 이 사무라이처럼 천국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 천국을 직접 맛보려고 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국은 직접 체험하고 맛봄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듣고 생각하고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알려고만 들뿐, 직접 몸으로 또 맘으로 그리하여 삶으로 느껴보려고 하지 않는 데에 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도 있는 성싶다.

또 다른 일본 선사들의 이야기이다.어느 비오는 날 탄잔 스님과 에키도 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다. 궂은 비에 길은 진흙탕 속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한 시내가 나타났다. 시뻘건 진흙탕 물이 그득 흘러가고 있었다. 그 냇가에 한 젊은 여인이 기모노를 입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탄잔 스님이 여인 앞으로 가서 등을 내밀었다. 여인은 머뭇거리다가 그 등에 업혔다. 스님은 그 여인의 옷이 진흙탕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시내를 건넜다.

다 건넌 탄잔스님은 여인을 뚝에다 내려주었다. 여인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제 길을 떠났다. 두 스님도 말 없이 길을 걸었다. 밤이 되어 어느 한 절에서 쉬어 가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키도 스님이 입을 떼는 것이었다.

탄잔 스님, 우리는 도를 닦는 수도승들이 아닙니까! 여자라면 멀찌감치 피해 다녀야 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여인을, 그것도 그렇게 젊은 여자를, 등에 업고 갈 수 있단말이요!

그 말을 들은 탄잔 스님은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에키도 스님, 나는 아까 그 여인을 뚝에다 내려놓고 왔는데, 스님은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가고 있군요!

누가 진정으로 도를 깨친 자이며, 누가 과연 자유함을 얻은 사람인가? 불가의 계명과 그것을 잘 지키는 에키도인가, 아니면 계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그것을 어기는 탄잔인가!비록 다른 종교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무엇인가 크게 반향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모두가 지성과 감성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한동안 아니 지나간 수백 년 동안 서구의 합리주의와 과학적 사고에 물들은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이성의 칼과 합리의 성곽 속에서 해결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잘살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행복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느끼는 면에서는 결코 진보하거나 혹은 개선된 것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이 공허하며,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으로까지 파급된다는 데에 더욱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심심해서 그랬다고 말하는 이웃 나라 일본의 청소년의 이야기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공허함을 느끼는 현대인의 극단적인 면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치료하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이 점에서 현대의 상담과 심리치료는 참으로 의미가 깊다. 상담과 심리치료는 여러 갈래가 있으나, 모든 방법들이 사람의 감정을 그 첫걸음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공통적이다. 즉 사람을 지성이나 영성의 존재로 보기 전, 우선 그를 감성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육, 혼, 영의 존재로 볼 때에 바로 육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보다 기초적이다. 혼이 지성과, 영이 영성과 관계 있다면, 몸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 바탕이 된다. 마치 배가 고플 때, 불안감을 느끼고, 배가 부를 때 편안감을 느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몸의 느낌이 정신이나 영적인 일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금식이나 요가 또는 금욕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제어하려는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많은 현대의 심리치료법은 감정의 상태와 연관된 몸의 반응을 매우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 분노의 감정이 심장을 해하고, 미움의 감정이 몸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웃음이 근육의 긴장을 풀고, 눈물이 해로운 호르몬을 몸밖으로 배출시킨다는 것 또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정을 치유함으로, 몸이 치유되고, 또 그러는 가운데에서 우리 삶이 변한다. 지성이나 영성도 중요하지만 감성에 착안하는 치유법과 그것을 널리 펴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다. 지성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의 물결이나, 영성만을 강조하는 교회 내의 물결에 더하여 감성을 중요시 여기는 상담의 물결이 합하여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인간 변화를 꾀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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