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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모] 거울로서의 가족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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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로서의 가족

거울이 없는 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불가능하다. 요즈음에야 흔하디 흔한 것이 거울이지만, 혼수나 집들이 선물로 빼어놓을 수 없던 품목이 거울인 적이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토록 귀한 물건이기에, 거울이야말로 사랑의 징표가 되어, 헤어지는 남녀가 거울 반쪽씩 나누어 가지고 후에 그것을 맞춰봄으로 사랑과 사람을 확인하는 이야기도 생겨났었고, 아주 먼 옛날에는 거울을 소지하는 것이야말로 신분상의 크나큰 표식이기도 했었다.

거울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생명은 사물을 있는 그 모습대로 보여주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사방 벽에 거울이 걸려있을 뿐 아니라, 천장에까지 거울을 달아 사람을 온통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현대의 방 치장은 그야말로 요지경일 수도 있다. 심리적 현상에 이런 거울의 기능이나 효능이 최초로 원용된 것은 아무래도 나르시스의 신화일 것이다. 연못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하여 결국은 그 물에 빠져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거울의 반영적 힘이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음을 실감나게 상징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쟈크 라캉은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세계와 상징적으로 놀이를 할 수 있는 데에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설명하곤 하였다. 거울 앞에 서서 반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그것이 자기인 줄을 모르는 닭이나 소, 심지어는 원숭이까지도 이 점에서 사람과 판이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최초의 거울이란 벽에 걸린 거울이 아니라, 그것은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설파한 사람은 영국의 정신분석적 대상관계이론가 도날드 위니컷이었다. 그는 여느 동물들과는 달리, 젖을 먹는 새끼가 그 어미의 얼굴을 보게 되어있는 존재는 인간뿐임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엄마의 얼굴이야말로 바로 그 아기의 최초의 거울임을 설파하였다. 즉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는 심지어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연구한다는 말까지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연구를 통하여 아기는 결국 자신의 모습을 세세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갓난아이가 제일 잘 보는 시정거리가 약 30cm임이 알려지고 있는 데, 젖을 먹는 아이의 눈과 엄마의 얼굴이 그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어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젖을 먹이는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짜증난 것이라면 아기는 자신의 모습이 못나고 성가스러우며 환영받지 못할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젖을 먹이는 엄마의 얼굴이 온화하고 평화스러우며 사랑이 가득 담긴 것이라면 아기는 자신이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임을 보게 될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신분석의 다니엘 스턴이란 의사는 마크와 프레드라는 쌍둥이 들을 키우는 한 엄마를 1년여 넘게 관찰하면서 이렇게 거울로서의 엄마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쌍둥이지만 마크와 프레드는 각기 다른 특질을 보였는데, 엄마에게 프레드는 어딘가 정이 가지 않았고, 마크는 엄마와 보다 친숙하였다. 마크의 일거수 일투족에 엄마는 환호를 보이면서 반응을 보였는데, 프레드하고는 시선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이 두아이에게 엄마가 반영하는 정도나 모습이 판이하게 다름이 포착된 것이다. 일년 후 닥터 스턴이 두 아이를 세밀히 검진하게 되었을 때, 마크는 아주 행복하고 잘 적응하는 아이로 크는 것이 발견되었지만, 프레드는 사회성이 결여되고, 마치 신경증에 걸린 사람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드러났다. 먹는 것, 입는 것, 생활 환경 모든 것에 차이는 없었고, 다만 엄마의 눈길만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눈길이 쌍둥이이지만 그렇게 서로 다른 아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 표정, 그 눈길 하나가 어린 아이들을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엄마의 얼굴과 그 시선을 거울로 삼아 자란다. 그러나 어디 이것이 엄마뿐이겠는가! 가족이야말로 그 개개인에게 하나의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다. 갓난 어린아이야 보는 것이 젖 주는 엄마 (요즈음은 아빠 포함)의 얼굴뿐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자라면 온 가족이 다 거울이 된다. 남편은 아내의 거울이 되고, 아내는 남편의 거울이 된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 된다. 그리고 형제자매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된다. 이점에서 바로 현대의 가족이 심리적으로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됨을 우리는 절절히 체험한다.

한번은 필자의 큰아들이 중학교에서 반장이 되었다고 집에 와 자랑스레 보고를 하였다. 엄마 아빠가 칭찬을 하였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초등학생인 둘째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부반장도 한 번 못해 보았는데

그러자 엄마가 둘째를 달래는 것이었다.

너는 대신 수학을 잘하고, 컴퓨터도 잘 하잖아.

그날 저녁 식탁에서 밥을 먹는데, 난데없이 둘째가 이런 말을 꺼냈다.

가족이란 참 좋은 거야.

왜 그러냐고 우리는 물었다.

음, 가족은 슬플 때 서로 위로해주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니까.

이젠 쉰 줄에 들어선 필자는 자라면서 가족이란 것이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며, 출생과 육아를 담당하되 그것을 영리나 경제적 대가를 통해 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 등등으로 배
우곤 하였다. 사실 가족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 그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족의 기능이나 주된 사명이 이러한 사회학적 혹은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철지난 것으로 느껴지곤 한다. 혼인 숫자와 이혼 숫자가 엇비슷하여지고, 가족 해체가 논의되는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녀가 같이 살면서 자녀를 낳고 경제생활을 한 단위로 유지한다고 그것을 가족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족의 근원적인 사명을 감정적 유대와 인생의 의미의 공유로 보는 것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혈연적 가족 개념보다도 정서적 가족 관념이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생겨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매우 과격한 개념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숙집에서 살지언정 그 하숙생들끼리 감정적 유대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의 진면목을 반영하여 주는 삶을 산다면, 혈연으로 묶여져 있으되, 서로에게 소외된 식구로 구성된 가족보다 더욱 더 진한 가족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감정적 유대의 공동체 운동이나 그런 감정적 유대를 구하는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대체가족의 등장이라는 말로 가끔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21세기 우리 한국의 가족들이 변모하여 가고 있다. 아빠는 돈을 벌고, 엄마는 밥을 지으며, 아이들은 공부나 잘하는 것이 건강한 가족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가족은 경제나 신체적 안위에 앞서,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적 지지자가 되어주고, 사회적 격려자가 되도록 부추겨주는 데에서 찾아야 되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돈 잘 벌어다 주는 것 이상으로 여보, 힘들지 하고 정서적으로 접촉을 주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고도 또한 실질적인 가족간의 교류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족은 이제 핏줄을 나누고 한 지붕을 공유하는 데에서 정의되는 것이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는 즉 감정적으로 공감해주고 반영해주는 정서적 동반자성에서 일차적으로 정의되기에 이른 듯 싶다.

이것을 현대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욕구의 인간이 아니라 관계의 인간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먹고, 입고, 자는 등의 기본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에 가족의 기본요건이 있는 것이기보다는 서로 의지하고, 감정을 교류하고, 상호교류하는 데에서 가족의 기본요건을 찾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아내의 의욕에 찬 얼굴에서 남편은 자신의 인생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활기 넘치는 아이들의 얼굴 속에서 부모는 자신들의 인생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가족이론이나 치료이론은 당사자보다도 그 식구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찾아보고 연구하여 보라는 명제를 얻는지도 모른다. 오늘 내 배우자가 행복한가? 오늘 내 자녀가 행복한가? 바로 거기에 나의 자화상이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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