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칼럼

교수논단

게시판 읽기
[고영순] 공감피로 | Compassion Fatigue

chci

  • 조회수8,635

공감피로 | Compassion Fatigue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업, 더군다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무력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람에 대해 불신이나 피해의식에 쌓여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성폭력을 당한 어린 아이의 Body 검사를 위해 chaplain (병원 목회자) 자격으로 입회해 본 경험은, 나로 하여금 결코 지울 수 없는 충격 (trauma)을 갖게 하였다. 아이가 조금만 성기 부분에 이상이 생겨도 놀이방 교사를 의심하는가 하면, 딸애의 첫 생리 때, 엄마인 내가 조절이 안 되는 정서 불안을 겪을 정도였다. 어쩌면 나는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그 전공 경험으로 인해 오히려 정서적으로 취약한 (vulnerable)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돌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충격적 역전이(traumatic countertransference)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보고가 있다. 응급실의 의사나 관계자들, 치명적인 삶의 경험을 한 사람을 다루는 상담가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대변자들(advocates)은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기력(powerlessness)에 빠질 때가 있다. 약간의 휴식이나 여행을 통해서 무기력을 해소할 수 있는 피로(burn-out)하고는 그 정도가 다른, 어쩌면 이 경험으로 인해 직업을 포기해야 하거나 극도의 우울증, 불신을 넘는 피해망상증, 또는 일상의 삶에 지대한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종의 병(sickness)을 앓게 되기도 한다. 그 병을 이름 하여, “공감피로”라고 한다. 일종의 공감 혹은 상담 증후군이다. 내담자가 아닌, 치료를 하는 상담자가 걸리는 병명이다.

전이(transference)는 내담자가 어릴 때 부모나 이에 비길만한 사람들에게 느꼈던 감정(성적, 사회적, 도덕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으며, 상담자에의 기대와 희망, 관심과 신뢰, 우정, 사랑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그 내면에는 보다 높은 공감 능력, 가치에의 희구가 있다)을 치료자에게 옮기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는 거꾸로 상담자의 그러한 감정을 내담자에게 옮기는 것을 말한다. 공감피로를 일종의 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의견 근저에는 “감정은 전염된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의 충격적인 경험을 들었을 때, 혹은 사건을 목격했을 때 그 충격의 정도가 너무나 극심하면, 그것을 듣거나 본 사람에게 그 충격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자기의 일상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육체보다는 정신, 몸보다는 이성이 더 가치가 있고, 그 육체와 몸을 상징하는 말이 여성인 사회 속에서, 강간이나 가정폭력 피해자를 자주 접하는 대변인 여성들은 피해자들의 피해감정에 전염되고, 그들 몸의 상해를 보고 결코 자신도 안전할 수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 절감하는 감정이 너무 강해질 때 역전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적지 않은 가정폭력 성폭력 대변인들 중에, 갑자기 사는 것에 전혀 의미를 못 느끼며, 내담자들에 대해 냉소적이 되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조적이 된다는 것을 호소한다. 사회 구조에 대해서 의분을 가지고 바라보던 시각도 점차 힘을 잃게 되고, 아무리 열심히 살아봐야 변화는 없을 거라는 다소 염세적인 시각까지 갖게 된다.

굳이 충격적 경험을 다루는 치료자가 아니더라도, 거의 매일 반복되이 듣는 상처의 이야기는 상담자 자신도 의식 못하는 사이 그 우울의 정서에 감염되기도 한다. 아무리 도와주려 애를 써도 결코 내담자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상담자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회의가 생길 수 있다. 응급실 의사의 경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도와줄 수 없는 어린 아이의 죽음은 자기 직업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력감이 쌓이고 쌓이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은커녕 감정이 없어지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가 일하는 영역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무력감도 큰 것이지만, 생활인으로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대인관계를 원활히 못해내는 치료자 (목회자든, 의사든, 상담가든 간에)들의 좌절 또한 공감피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의 어려움은 어떻게든 인내하며 들어주면서 자신의 필요는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담자에게는 관계의 역학에 대해 이해시키면서도, 자신의 일상에서는 적용을 못하는 것이 우리네 상담 사역자들의 고충이다. 나 자신, 성격적 문제라든가 대인관계의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거나 냉정할 수 있으면서, 내 어려움이나 아픔에 대해서는 그렇듯 상담적 자세가 되지 못하는가 말이다. 그럴 때는 상담을 공부했다는 것이 후회 막심하기도 하다.

다행한 점이 있다면, 그런 고충에 대해 안전하게 도움 받을 지원그룹(support group)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면서,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줄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로 사는 것도 인생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요는 그런 인생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지혜와 평안을 구할 수 있는 관계의 망(net)이 있다면 말이다. 미국에서는 사회복지, 병원 응급실, 상담, 목회, 심리 치료(therapy)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전문 직종 안에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지친 마음을 서로 달래준다. 지원 그룹을 가질 수 없는 여건에 있는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영성 안내자 (spiritual director)를 만나,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진다. Spiritual director를 꼭 연배가 높다거나 영적 도움을 주는 전문가로만 생각할 건 아니다. 상담 사역을 하는 동료로서 신뢰할 수 있고, 공감피로에 대한 같은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영적 친구 (spiritual companion)가 될 수 있다. 내담자로나, 나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할 때, 나에게는 같은 상담의 길을 가며 내게 영적 도움을 주는 spiritual mentor와 지원그룹이 있었다. 유학생으로써, 시카고 여성 핫라인 (Korean American Women In Need)에 오래 몸담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든든한 이 지원 그룹의 영적 도움 때문이었다.

아무리 복지 시스템이 잘되 있는 미국이라 할지라도 소수민족으로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더더군다나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로서 건강하게 살아남는 일은 참으로 긴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 내담자와의 관계가 몇 년을 가기도 한다. 결코 결과가 긍정적이지만도 않다. 대변자들(advocates)은 서서히 지치고, 하는 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기 시작한다. 자칫 이 일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서로를 지탱해야 할 어떤 제도적 시스템이 필요해 진다. 시카고 여성 핫라인의 어느 누구도 ‘WOORISORI’라는 풍물그룹이 그렇게 지속적인 Support 시스템이 되리라고 예상 못했다. 미국 내 여러 여성 conference에도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였고, 소수민족이 모이는 곳이면 숫자에 상관없이 공연으로 지원을 해 주기도 하였다. 사실 이 그룹은 치료자들 (상담가들)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야 하겠기에 만든 그룹이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모여 풍물을 배우며,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시간도 가지면서, 오랫동안 상담의 길을 같이 가리라 서로 다짐하였다. 공감피로를 풀지 않고는, 제 아무리 의미 있는 일도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했기 때문이다.

몇 년을 시카고 여성 핫라인의 지원그룹 속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무엇보다 힘든 것이, 심적 영적 지원을 받을 어떤 곳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상담에 대해 구체적 조언을 구하거나, 내 개인적으로 힘든 삶의 문제들에 대해 털어놓고 얘기할 곳이 없었다. 치목원 상담실에 있는 상담원들과 이런 고충에 대해 얘기할라치면, (이미 나는 이곳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고 보니), 내 힘든 점에 대해 그만큼의 무게와 색깔만큼 공감을 받지 못하는 느낌이다. 아직 공감피로에 대한 인식이 절실하지 않거나, 상담가의 심적 영적 어려움은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으로, 서로 나눌 수 있는 꺼리가 못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치료자들의 지원그룹은 자기노출을 하는 장으로서가 아니라, 전문가로서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한 자기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담 사역을 하는 동료들과 건강한 지원그룹을 만들어, 공감피로를 나누는 것이 내가 치목원에서 하고 싶은 일중의 하나이다.

게시판 목록이동
이전글 치유사역에서의 영성훈련
다음글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