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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순]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들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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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들


융은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 원형들이 존재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원형” (archetype)이라 함은 집단 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ness)과 같은 것으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안정적이며 긍정적인 잠재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 인류가 몇 세대에 걸쳐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본능적 에너지로 이러한 원형은 우리들의 행동, 사고, 느낌, 반응 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행동양식의 원형이 실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잘못된 길로 빠지거나, 사람들과의 불행한 만남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면, 정서장애를 일으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심리적 문제들은 역으로, 원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모의 잘못된 행동과 자신의 원형 (신비로운 본질이며 에너지의 흐름)과의 괴리 때문에 정서장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 안에 어떤 에너지들이 각인되어 (imprinted) 있다는 것일까?

융은, 우리의 무의식적 차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 (아니마)을 억압하게 되고 여성은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 (아니무스)을 억압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닌 한 성을 억압할 때 그 사람은 온전성에 이르지 못하고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된다.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다른 성의 통합 없이는 심리적인 성숙, 영적 성숙에 도달할 수 없다. 남성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는 남성다움을 고양시키고,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 내부의 남성적 요소는 여성다움을 고양시킨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격 (personality)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면, 남성의 경우에는 정서생활이 풍부해지고, 사랑하고 관계하는 능력이 확대되고, 느낌과 관계가 깊어진다. 여성의 경우, 합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힘이 가능해 진다.

문제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가치중립적 이기가 어려운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남성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회이다. 구별, 논리, 인식의 능력을, 수용하고, 감정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능력보다 더 가치를 두는 사회 말이다. 융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면 (아니마/아니무스)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에는 가치가 전제된 성 (sex)적 이해가 아닌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를 말한다. 가치가 전제되어 있는 성의 일예로,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인, “화성남자, 금성여자” (John Gray)가 있다. 이 책을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기본적 특성을 다룬 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 Gray는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오리엔테이션 (사회화)이 되었으니까, 그 사회화된 대로 (거기에 맞춰) 반응을 해주면 훨씬 더 관계가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Gray에 의하면, 남자들은 능률과 효율, 업적을 중시한다. 자기능력을 입증해 보이거나 힘과 기술을 신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목적을 이루는 능력을 통해 그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성공과 성취를 통하여 충족감을 맛본다. 그들은 사람들이나 느낌보다는 ‘사물’과 ‘사실’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전적으로 혼자 일을 처리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다. 자율은 힘과 능률, 능력의 표상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개인간의 친밀한 관계, 아름다움 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서로 도와주고,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는 일에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느낌과 남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 그들에게는 일이나 기술보다는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며, 남성의 IQ (Intelligence Quality)보다는 EQ (Emotion Quality)적인 세계를 꿈꾼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헤아려 주고,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펴주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 상대가 청하지 않아도 미리 알고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다르니, 남성은 여성에게 좀 더 감성적이 되고, 여성은 남성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Gray의 주장이다. 즉 Gray는 어떻게 남녀가 사회적 기대감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기반하여 관계를 기술적으로 (technically) 개선하자는 것인데, 자칫 또 다른 성 (SEX)의 정형화 (stereotype)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화성남자, 금성여자 식의 사고는, 우리가 지금껏 해온 여성성, 남성성에 대하여 좀 더 현실적이고 기술적이 되자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사고방식에는, 남편에게 꽃을 받기보다 찹쌀떡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이해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현실적인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 꽃가게를 지나다 향기가 너무 좋아 잠깐 멈추고 싶은 어느 남성에겐 남자답지 못하여 부끄러워야 할 일이다.

우리의 이중적 성문화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은 융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오해를 낳고 있다. 반면에, 같은 나라 미국에서 남성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원형들이 있다. 왕, 전사, 마술사, 연인의 에너지가 그것이다.

a) 왕 (King) 에너지: 왕 에너지는 소년기의 심리가 성인심리로 전환하는데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그 첫째는 질서잡기이고, 두 번째는 풍요와 축복을 주는 것이다. 미성숙하거나 제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는 왕 에너지가 부족하여, 그 가정에는 흔히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한다. 현명한 왕은 부하를 알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생명력을 준다. 그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준다. 축복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자긍심을 느끼거나, 칭찬을 받거나,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 몸이 실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있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연장자, 즉 왕 에너지로부터의 축복에 굶주려 있다. 그들이 ‘철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은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축복의 효력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며, 온전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치를 마땅히 인정받고 타고난 재능과 능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상받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왕의 원형은 우리의 내적 질서를 지켜 주고, 우리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일체감과 정체성 등에 대해서 중심이 선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약하건, 재능이 있건, 어떤 가치가 있건, 있는 그대로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고 고무시킨다. 그것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왕이며,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에 내재된 창조력을 격려하고 상을 내린다.

b) 전사 (Warrior) 에너지: 전사라는 형태의 남성 에너지를 불편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데, 이 에너지의 그림자 형태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바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적 분노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공격성은 전사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공격성은 삶에 대한 자세로서 의식을 일깨우고, 기운을 북돋우며, 동기를 유발시킨다. 우리로 하여금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하게 하며, 혹은 삶의 과제와 문제점들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선두에 서고, 앞으로 전진 하라고, 생명력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인생의 전쟁터에 뛰어들라고, 방향은 오직 하나, 앞으로 전진 하라고 충고한다. 전사는 올바른 상황 판단을 하고, 적절한 공격성을 취할 수 있다면 이긴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공격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명확한 사고와 분별력을 통해서이다. 전사는 항상 경계하고 있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그는 자기의 마음과 몸을 집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전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전사는 생이 짧고 나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의심이 일고, 의심은 망설임으로, 망설임은 행동의 포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행동의 포기는 전투에서의 실패로 이어진다. 긍정적 전사 에너지는 파괴될 필요가 있는 것만을 파괴하며, 무언가 새롭고 신선하고 살아 있으며 좀 더 영광스러운 것이 나타나게 한다.

c) 마술사 (Magician) 에너지 (자각과 통찰력의 원형) : 다윗 왕의 counselor였으며 예언자였던 나단은 왕을 위한 일종의 심리치료사였다. 왕의 언행이 거만하지 않도록 억제시켰으며, 부정을 꿰뚫어 보고 분별력을 발휘한다. 언제 어디서든 악이 선으로 가장하고 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린다. 고대의 왕들이 감정에 사로잡혀 특정인이나 마을을 벌주고자 할 때, 마술사는 합리적이고 예리한 논리로 일격을 가하여, 왕의 폭발적인 감정을 풀어주고, 왕의 양심과 상식을 일깨워주곤 하였다 (바쎄바 사건). 사람들은 심사숙고와 결정이 필요할 때, magician지혜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에너지는 자아(Ego)-자신(Self)의 축이 형성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 에너지는 안정성, 중심감, 정서적 냉정함을 확고히 지켜준다.

d) 연인 (Lover) 에너지: 에로스 혹은 리비도는 연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생동감, 살아있음, 열정이라고 불리는 태초의 원형 에너지이다. 외부 환경에 대한 감수성의 에너지로 융 학파에서는 이것을 ‘감각 기능’이라고 부르는데, 색, 형태, 소리, 감촉, 냄새를 지각하는 기능이다. 연인의 결합력은 지능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선 느낌으로 통한다. 연인은 경계선을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설정된 경계선에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종종 비인습적이고, 그는 ‘인습’에 대항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삶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감성과 도덕 사이의 갈등, 사랑과 의무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이 재현된다. 자기 내부의 강력한 느낌 속에서 내적 세계와 결합하기를 원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외부세계와 결합하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 행동하기를 멈추고, 존재 자체로서 느끼고,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느낄 때, ‘장미 냄새를 맡으려고 섰을 때’ 우리는 연인을 느낀다. 인간관계 속에서 연대감, 생의 환희, 열의, 연민, 동정과 원기를 느끼며, 우리의 삶과 목표와 일, 그에 대한 성취에 대해 낭만적으로 느끼게 된다. 연인을 적절히 접하면, 우리에게 삶의 의미, 감각을 준다.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열망케 하는 그 근원이 연인이다. “나는 그대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러 왔으니, 더욱 더 풍성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인은 말한다.

이들은 서로 중복된 부분도 있으나, 이상적일 경우에는 상호보완적이다. 훌륭한 왕은 항상 전사인 동시에 마술사이고 연인이다. 성인 남성 심리의 원형, 즉 고대 왕들의 자비심, 고대 전사들의 용기와 결단력, 마술사의 지혜, 연인의 열정이 지금 이 개인주의 시대, 그리고 아버지가 부재한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이 남성운동을 주창하는 Robert Moore 외의 융의 제자들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아버지란 존재가 가정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실재로는 부재하는 아버지가 되든지, 반(half) 아버지가 되든지, 혹은 반(against) 아버지가 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연결성, 친밀감, 관계, 부드러움 등을 여성적 특질로만 간주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편견과 그에 따른 콤플랙스와 관계가 깊다) 사실은 진정한 연인 원형의 에너지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원형 (하나님으로부터 원형적 남성 에너지와 원형적 여성 에너지 모두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의 식탁 친교를 통해 모든 원형적 에너지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 소외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을 자신과 연결시켰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면서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 안에 이런 원형들이 있다니, 스스로를 볼품없고 능력 없다고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나는 아름답고, 단호하면서도, 지혜로우며,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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