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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이 내 편인데...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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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밭에 있는 잡초를 다 베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밭은 또 다시 잡초로 무성해졌습니다.
뿌리까지 뽑지 않은 잡초가 짧은 시간 안에 왕성하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보면 그 부분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뿌리는 다른 곳에서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유그룹에 들어 온 김 집사는 마흔 두 살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은 힘들었고, 회사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에게서 어두움의 그림자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별나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 다른 가정에 비하면 안정적인 어린시절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다 열아홉에 한 여학생을 만났고, 그들의 사랑은 스물 한 살이 되도록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감정이 격렬해지자 남자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여자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 순간 여학생은 충격을 받고 울음을 터뜨리며 뛰쳐 나갔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뛰쳐 나갔던 여학생은 처참한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생을 마감했답니다.
김 집사는 그 여인으로 인해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스물여덟에 시작한 결혼생활을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어두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치유그룹에서 만난 김 집사는 중년에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21년 전 그 사건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몇 십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그 여인이 아직도 그를 떠나지 않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처녀 귀신이 원한이 맺혀서 김 집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 여학생은 처녀귀신이 되어서 김 집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 여인은 21년 전에 죽어서 이 세상에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김 집사는 여인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마음에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없는 한 여인을 죽였다는 강한 죄책감이 그의 기도생활이나 대인관계 그리고 직장생활에까지 힘들고 어둡게 파고 들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특별히 아내와의 행복한 잠자리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행복한 잠자리를 한 후에는 앓아 눕곤 했습니다.
치유 과정에서 김 집사는 여인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아직도 붙들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21년 전 그 사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그 때의 정서나 감정, 심지어는 믿음생활에서도 그 사건에 얽매어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치유그룹에서 21년 전 그 여인을 상상으로 만납니다. 그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김집사는 그 여자가 되어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그녀의 마음이 되어 봅니다. 진심으로 그를 믿어주며 함께 아파해 주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무의식 속에 항상 품고 살아 온 여인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떠나 보내었습니다.
이 치유과정을 마친 후 그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내와의 관계였습니다. 아내와의 사이가 원만하며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부부간에 드리워졌던 어두운 안개가 걷히면서 김 집사의 얼굴엔 서서히 밝은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풍성한 삶의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행복하고 싶은데 삶이 어둡게만, 힘들게만 굴러갑니다.
나의 삶이 힘든 것은 반드시 삶을 힘들게 하는 과거나 현재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연이나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를 잡는 순간, 삶을 어두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운전사가 되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림자는 성장과정을 통해 내면에 깊이 자리를 잡습니다. 어린 시절, 잦은 부모의 싸움은 아이로 평생을 불안의 운전사에 끌려 다니며, 주눅 들린, 그리고 흥을 잃어버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서운 부모 슬하에서의 성장은 병적인 분노의 운전사에 시달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자녀를 부모가 편애할 때,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자녀는 평생을 애정에 배가 고픈 운전사에 시달림을 받습니다. 거절의 환경 속에 자란 아이는 일생을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움과 고독의 운전사에 끌려 다닙니다.
어두운 그림자와 병적인 운전사를 고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병적 증상은 불안, 우울증, 불면증, 병적 분노, 도박, 마약, 그리고 수많은 심인성 질환 등이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병든 내면의 운전사가 결국 도착하는 곳은 종합병원으로, 여러 병적 증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그렇기에 내면의 치유란 나의 삶을 힘들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 곧 불행한 삶의 운전사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힘든지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가 팔자나 운명입니다. 내면치유에서는 인간의 운명이나 팔자 타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힘든 것은, 파고들면 반드시 그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삶을 원치않는 불행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부정적인 삶의 운전사를 발견했다면 내면치유의 두 번째 작업은 그 어두운 삶의 운전사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운전사를 찾아내는 일이나 마음 속에서 그것을 몰아내는 일은 단시일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영역은 인식뿐만 아니라 행동과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시간과 훈련을 요합니다. 치유의 과정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타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의 치유를 받는데 빠른 응답을 기다립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상담하고 어떤 도움이 있으면, 우리는 그 즉시, 괴롭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록 캄캄한 어두운 길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딛기 보다는 평탄 한 길에서 홀로라도 빨리 가는 것을 더 원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연약한 부분이, 우리의 삶의 변화가 더디 온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비록 길고 더디더라도 회복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멍들고 긁히고 상처로 곯은 곳을 치유하기 원하시고, 또한 치유하십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시편 147:3절)이 내 편인데 무엇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며 실망하게 할 수 있습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마음과 영이 힘을 잃고 누워있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 우리를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고, 함께 뜨겁게 기도하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동료인, 이웃의 모습으로도 오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작은 예수님을 우리 연구원의 영성수련과 그리고 부부사랑만들기 등에서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진행되는 많은 치유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동료들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기도를 서로 나누는 가운데 베데스다를 찾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어서 우리의 아픔도 치유하심을 실감합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적으로 쓰여지고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소망의 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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