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에 속할까요? 늦가을에서 초겨울을 지나는 시기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시기는 수확을 거두는 시기, 그리고 자신이 거두어 놓은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60-70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60-70살의 노년기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많은 이들은 젊은 사람만 귀하고 힘있고, 능력있고 노인은 한풀 꺽어진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보는 인생행로와 연관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생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약, 강, 약의 순서로 청년기와 중년기를 인생의 최고 전성기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어린아이는 준비단계, 중년 이후부터의 노년까지를 하향단계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한 관점은 노인을 이미 가치를 상실해버린 인간으로 간주하며, 늙어가는 것을 상실이나 하향, 쇠퇴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노년에는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 반면, 얻는 것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기는 젊었을 때와 꼭 같은 힘이나 업적으로 성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시절과는 다른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충만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어르신들의 삶은 때로는 고달프기조차 합니다. 몸은 점차 아픈 데가 늘어가고, 또 직장이나 집안에서의 역할 상실과 경제적 위축, 친구나 주위 사람들이 하나씩 죽음으로 떠나가는, 소중한 관계들의 상실로 인해 심한 소외와 고독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의정부에 사셨던 최 선생이야기는 이 시대의 준비되지 못한 실버시대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흔 다섯의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땅에 묻고 돌아온 밤,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인가! 자식들의 싸움 소리였습니다. 6남매를 생명처럼 키웠습니다. 딸 셋, 아들 셋, 셋은 의사고, 셋은 교수입니다.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에 6남매가 한 방에서 싸우는 이유는 아버지를 누가 모실거냐?는 것이었습니다. 6남매가 아버지를 서로 안 모시려고 싸우는데,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이럴 수가,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럴 수가…” 그 다음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6남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로우시니까 여행 갔겠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뒤에 아버지는 어머니 묘 앞에 쓰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운 마음이 얼어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세상을 떴는데,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최 선생이 누구의 얘기입니까? 우리의 얘기가 아닌가요? 여러분! 노인은 외롭습니다. 자식들이 노인을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노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 어머니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자기 부모를 이해하며,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서 키울 때 “아! 우리 부모가 이랬구나!”, 그러나 그때까지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겨우 자신이 늙어서 자식을 만나볼 때, 자식이 대하는 걸 보면서, 그제서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아팠을 때, 그때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지,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도 죄인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한 번도 섬에 계신 어머니의 그 마음을 몰라 주었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떠나던 때, 어머니는 예순 다섯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섬에 계셨는데 내일이면 저는 섬을 떠납니다. 그때, 어머니가 어렵게 어렵게 꺼낸말, 참고 참다가 말을 꺼냅니다. “나, 너 미국 가는 비행기 타는 것 보고 싶어.” 그 말씀은 섬에서 나하고 하루종일 목포로 배타고 나와서 목포에서 서울로, 서울에 김포공항서 비행기 타는 것보고 돌아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려면 누군가 모시고 함께 와야 하고 섬으로 모시고 내려가야 되고… 나는 그 때 어머니 마음을 한 푼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만 했습니다. 누가 모시고 비용은 누가 어떻게 될건가! 어떻게 내려가실 건가? 저는 그 순간 어머니에게 매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어매 안돼! 나 미국에서 곧 와” 그날 밤 초롱불 밑에서 우리 어머니가 아무 말도 안하시고 일어서서 어머니 방으로 가시더니------. 미국 간 후 3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예순 여덟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서울 와서, 나 비행기 타는 것보고 가셔야 했습니다. 그렇게도 이해해 주지 못했을까? 저는 제 자식을 키우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워했습니다. 어머니도 귀여워했었구나 하고 실감합니다. 내 자식이 우리 마음을 몰라주면, 내가 몰라주었구나! 어머니 마음이 이렇게 외로워겠구나!
자식은 부모마음을 이렇게 모릅니다. 자식이 부모 마음을 몰라줄 때 외롭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4천4백만인데 그중 노인 인구가 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만이 넘는 노인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며, 보리고개를 넘기며,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일구어 오신 분들입니다.
여러분! 실버세대를 이렇게 외롭게 놔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피땀 흘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외롭게 놔 두냐? 예수님은 외로운 분들을 그냥 놔 두시지 않습니다. 한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왔던 노년을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춤을 추게 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노년을 외롭게 살아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는 노인이 인생의 꽃이었습니다. 노년을 모든 인생을 지도하는 지혜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보았습니다. 성경 레위기 19: 32 “너희는 머리가 하얀 사람 앞에서 일어서라. 노인의 얼굴을 보면 공경하라. 너희가 하나님을 보듯 경외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느니라”. 잠 15: 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그렇기에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년기는 구원의 희망을 향해가는 시기요, 인간성숙의 정점인 자기 실현을 위한 안식년에 접어드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시기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사회에서 노인은 인생의 안식을 취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 일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노년기는 매일이 안식일이므로 인생의 안식을 즐기는 때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날입니다. 이 날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재창조를 위해서 자신을 정리하고 힘을 비축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은 그냥 쉰다며 게으름을 피거나 생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을 통하여 자신의 영혼이 깊어짐과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계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안식의 의미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어르신들의 삶에도 임해야 합니다. 어르신들의 영적건강, 육신의 건강, 주위환경, 관계, 그 모든 면에서의 건강하고 온전한 샬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노년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나라 앞에서,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이렇게 외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고…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춤추는, 또 마음껏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이렇게 내 마음 속을, 한 응어리를 함께 나누는 동지가 있고, 이야기를 마음놓고 나눌 수 있는 만남이 있다면 병이 낫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노년기의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이 샬롬을 위한 걸음이, 그 첫걸음은 비록 작은 실개울이었더라도 천이 되고 만이 되고 그리고 마침내는 이 시대를 덮을 온전한 평강이 될 날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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