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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건강한 청소년을 원한다면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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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무리져 있는 청소년들을 바라볼 때 그들을 긍정적인 눈길로 바라보며 “아, 저 아이들이 이 땅의 미래야”라고 말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

언제부터인가 청소년들은 성인들에게 부담되는 그리고 코드를 맞추기가 정말 어려운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요즘 교회마다 청소년사역을 두고 고심을 많이 하고있다
청소년들의 코드에 맞추기도 쉽지 않고 그들의 코드가 진정 무엇인지도 알기가 쉽지 않다. 학교의 교육이 그리고 선생님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아이들도 잘못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기 쉬운 것이 현시대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청소년들을 위하여 복의 근원되는 가정이 바로 서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이 바로서고 부모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하는 이 시대에 가정과 부모는 아이들과 동상이몽 속에 그들의 꿈을 아이들에게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원해야 되는데 사실 그런 부모를 만나보고 싶을 지경이다.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많은 신자들이 자녀교육에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수를 믿는 부모도 아이들이 공부잘해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 얻는 것이 자녀교육의 목표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며 자라는 청소년들은 특히 믿는 부모의 이중성을 발견하고 신앙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부모이다.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보고 배우고, 싫다면서 지적하면서도 배우고, 부모에게 반항하면서도 배운다. 그러면서 아이들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모도 부담되지만, 가장 영향력있는 멘토로서 부모는 자리잡게된다. 자녀들의 멘토… 부모님들의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낀다. 부모와 자녀도 관계가 살아있지 않으면 무늬만 가정이 되는 것을 잊지 말자.

교회의 청소년사역도 관계에서 시작되어 삶을 나누는 사역이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프로그램도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할수는 없다. 그러기에 청소년 사역은 관계에서 시작되며 형성되지 않은 관계 속의 사역은 아무런 열매나 변화를 맛볼수 없다. 청소년들의 방황은 우리의 사회와 가정이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아이들에게 시험을 준비하고 공부한 과정보다 성적이라는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지금의 현실은 우리의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사실 아이들이 잘못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기 쉬운 현시대는 청소년 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반면에 지금은 청소년 사역의 가장 좋은 기회가 주어진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관계가 지금 학교에서도 그들이 다니는 학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또 하나의 친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나 사역자를 통해 멘토를 얻고 싶어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역은 그들의 생각과 고통 그리고 감정을 함께 나누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교회청소년 사역은 그들의 문화와 생각에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70-80년대의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이끌기엔 역부족이다. 수련회를 하여도 그들의 문화에 맞는 기획을 하고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아무리 잘 준비되어도 관계가 없는 사역은 청소년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없다. 1대1이나 1대2로 만남을 형성하고 밀접하게 관계를 쌓아 가면 그때부터 사역이 시작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많이 외롭고 힘들어하기에 좋은 관계를 맺으면 그들의 가치관도 변화된다.

청소년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자신들을 위해 관심을 누가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 관심은 지속적이어야 하며 진실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한 후 첫 설교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에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예배에 참여하는 인원이 거의 없었고 대개 문자를 보내고 서로 킥킥대고 떠들고 심지어 자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물론 신앙이 없었겠지만 목사와 아무런 관계를 가져보지 못햇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목사에게 반항하라고 가르쳤다. 반항은 그래도 반응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너무 일방적인 교육방법 때문에 관심을 잃었다. 자신들을 위한 사역임에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지지 않음에 실망한다. 그들의 반항과 지적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긍정할 부분에 긍정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이 사역자를 신뢰할 수 있다. 반응이 없는 아이들은 교회에서 자신들을 정말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역자들이 없다는 것에 더 이상의 마음을 붙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가정으로 한번 시선을 옮겨보자. 가정에서는 얼마나 아이들을 존중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가? 부모의 관점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녀의 관심에 그리고 그들의 꿈에 대한 대화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자. 특별히 치유를 회복의 근원으로 공부하는 우리들은 자녀의 삶에 어떠한 치유의 사역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가정은 치유받는 곳이어야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상처를 이 세상의 방법으로 교육하기 때문에 주고받는다. 하나님께서 귀한 달란트를 주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아이들임을 잊지 말고 우리들의 욕심을 버려야 아이들의 꿈이 살 수 있다.


한국교회는 장년을 위한 교회이다. 아주 쉽게 예산을 보면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교회가 제시하려면 청소년 사역에 우리가 먼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한다. 청소년들은 관계를 넓히기 원한다. 지금도 어른들 중에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며 함께 관계를 맺어줄 모델을 기다린다. 관계없는 사역이나, 관계없는 규칙들은 반항만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사역을 다 감당하기엔 사역자가 시간적으로나 여건상 문제가 많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청소년 전담 사역자가 없다. 교역자중에 주일 사역으로 하는 경우나 파트 사역자가 사역을 한다. 그래서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도 그일이 쉽지 않다. 작은 예산에 프로그램을 짜고 시행하기도 쉽지않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변화되면 그들은 가치관과 인생관을 찾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신앙이 그들의 인생관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더욱 지원을 하고 사역자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교회의 책임도 크지만, 가정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왜 대화가 안될까? 그것은 서로의 말을 귀로만 듣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듣는 대화를 시작해보자. 그러면 가정이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다.
미국에서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대화를 하며 사랑(LOVE)을 TIME(시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함께 시간을 나누고 삶을 나누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다. 관계를 만드는데 시간투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시간을 내자. 부모도 내고 아이들도 학원과 과외에서 벗어나는 과감함을 보여주고 가정의 중요성을 지금부터 가르치자. 가정이 행복해야 청소년들이 행복하다. 지금부터 이야기의 장을 열어 놓지 않으면 그들은 죄의 유혹이 올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에게 찾아올 수 없다.

더욱이 청소년들은 지금 아이의 모습에서 어른의 모습으로 외향적인 부분만이 아닌 내적인 부분까지 변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관계를 맺을 때 그 부분을 잊지 말고 그들을 존중하자. 우리가 청소년의 삶을 너무 쉽게 해주어서 그것이 오히려 핸디캡으로 만들지 말자. 부모들도 그들의 삶을 먼저 결정하고 결정권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것은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청소년 사역의 주인공은 결국 그들이다.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고 그들을 존중하자. 그래야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위한 나무가 되자. 그들이 쉬며 인생을 생각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자. 관계중심적이고 그들을 존중하는 사역을 통해 건강한 청소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역을 오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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