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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우리 인생의 봄날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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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동해안 바닷가를 따라 거닐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전혀 없는 특별한 날 외에 일년 내내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에는 놀랍게도 해초가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맞으면서도 바위에 달라붙어 생명을 키워가는 저 해초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거센 파도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키워가는 해초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에 새삼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는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보배롭게,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기에, 충만한 삶을 누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항상 무거운 어떤 것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 같으며, 알 수 없는 공허감에 무언가를 채워야만 될 것 같아 허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이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안간힘은 중독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을 어둠 속에 가두고 구속합니다.

“우리 삶을 노예화하는 어떤 것”
사실 중독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수많은 중독은 크게는 물질 중독과 과정중독으로 나누고 있는데, 물질 중독은 알코올과 약물과 마약, 음식, 니코틴, 카페인 등 우리 몸 안으로 섭취되는 물질에 대한 중독으로, 몸과 마음은 이 물질들에게 의존합니다. 알코올 중독은 가장 보편적인 화학적 의존의 산물이며, 이러한 물질들은 대개 기분을 전환시키는 화학물질들입니다.
반면 과정중독은 사람을 집착하게 만들거나 의존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활동이나 상호작용을 말합니다. 일, 성, 도박, 쇼핑, 인터넷, 종교처럼 대부분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중독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이것은 물질중독처럼 중독의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일중독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중독이라 인식하지 않으며, 때로는 이런 행위가 장려받는 경우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중독은 물질중독보다 회복이 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물질중독의 밑바닥에는 서서히 중독되는 과정중독의 과정이 숨어 있으며, 과정중독의 밑바닥에는 인간실존의 연약함과 타락하기 쉬운 본성이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독의 라틴어 어원은 addicened으로 “양도하거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로마법정에서 중독자(addict)는 잡혀서 감금된 노예나 주인에게 넘겨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노예들은 어떤 사물들에 대한 소유권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의미입니다. 중독이 결국에는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다른 어떤 것에 넘겨주는 노예화 과정이기에, 결국에는 우리 삶을 노예화하는 어떤 것'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중독에 빠지는 것일까요?

중독은 인간의 실존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요인으로 신체적 요인이 강하던지, 아니면 정서적 안위를 얻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던지, 본질적으로 중독 행위 깊은 밑바닥에는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이런 욕구를 갖고 있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중독적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독은 인간의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의 생활에서 중독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중독적인 삶을 부추깁니다. 텔레비전을 잠깐이라도 보고 있으면, 사지 않고는, 혹은 흥분하지 않고는, 혹은 누리지 않는 인생은 바보라는 듯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고 충동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대중문화 그 자체가 광범위한 중독적 삶의 체계를 조장하고, 부추기고 있기에 이러한 가치관과 삶의 체계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보다, 아니 그러한 삶의 환경과 문화가 일어나는 현상 뒤의 근원에는, 바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어떤 것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하나님만이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우리 인간 실존의 고백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욕구를 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은 인간다움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며 놀라운 보물입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와 방향을 부여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왜 그런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목마름을 채우려는 욕구가 중독으로 나타납니다. 중독은 해결점의 방향을 잘못 찾은 목마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신체적인, 심리적인, 사회적인 여러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 중독은 단지,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한 집착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잃어버리며 노예화된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이 채워질 수 있는 그 자리를 우리가 집착하는 그 어떤 것을 통해 채우려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애착하는 어떤 대상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키려 발버둥을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며,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할 때 실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피난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과 명예와 돈에서 안전을 도모하며, 그 결과 움켜지고자 하며, 지키려 하고, 부풀리고자 끊임없이 염려하며 근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한 수많은 방법들로 우리의 목마름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기루임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마른 소금물임을 알지 못합니다. 갈증은 끊이지 않아 결국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한 우리에게는 더한 목마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중독의 치유에 있어 인간의 생화학적 특성과, 심리적, 사회적 요소와 그것이 갖는 역동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 영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이들이기에, 영성의 회복은 치유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관건입니다. 치유는 기도, 말씀 묵상, 영적 독서, 영적체험 등의 영성의 회복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때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삶의 전인적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혁이며 치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수시로 빠져드는 우리에게 호세아(6:1)의 말씀은 다시한번 흔들어 깨웁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광선이 우리에게 비취는 그 날을 위하여, 어스름한 저녁 무렵 마을 어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이제 발걸음을 돌이킬 때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날, 그가 우리를 낫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개나리, 진달래는 만발하여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어서 오라고, 잘 왔다고…' 그때, 우리 인생의 봄날도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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