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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어린 시절의 악머구리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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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악머구리

나는 사계절 중에서 봄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서른 일곱 살 때까지 나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봄앓이를 했었다. 봄만 되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까무라치곤 했다. 그러다가 서른 일곱 살 때 나의 심한 봄앓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일하느라 늘 바깥으로만 나돌던 어머니도 겨울이면 항상 집에 있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온 집안에 생기가 돌곤 했다. 어머니의 무릎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들끼리 밀쳐대며 싸우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봄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들에서만 살았다. 봄이 어머니를 빼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유일한 사랑의 원천이자 투정의 대상이던 어머니를 봄에게 빼앗겨버린 내 마음속에 비뚤어진 운전사가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그후 서른 일곱 살이 넘도록 나를 제 나이만큼 자라지 못하게 물고 늘어졌다. 따라서 나는 몸은 자랐으나 마음은 자라지 못한 성인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봄만 되면 내 안의 운전사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싫다고 투덜대는 대로 봄앓이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학생활 7년째, 내 나이 벌써 서른 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지도교수를 만나는 일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과 친해지지 못해서 안달인데, 나는 교수님을 마주치기가 두렵기만 했다. 이런 나의 태도를 오해한 교수님이 정색을 하면서 말 했다. 무엇 때문에 나를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하는 거냐? 날 그렇게 싫어하면서 내 밑에서 공부를 하겠다니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다른 학문을 공부해 보도록 해라. 너를 더 이상은 가르칠 수 없다. 더 가르칠 수 없다니!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모진 고생을 해 가며 얼마나 힘들게 해온 공부인데 이제 와서 그만두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맹세컨대 나는 결코 그 교수를 미워하거나 싫어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생으로서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매정한 교수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면서 말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싫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좀 무서워했을 뿐입니다.

무섭다고?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날 무서워한다는 말이냐? 그 교수는 자신을 무서워했다는 내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그 교수님과의 긴 이야기에서 나는 내가 교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등학교 1학년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의 아버지들, 특히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은 교육이라는 구실로 자식들에게 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었다. 식사를 할 때도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숟가락을 드는 자식은 후레자식이 되었다. 내 아버지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엄한 양반(?)이었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생선이 밥상에 올라온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보다 먼저 젓가락을 댄 적이 있다. 그 순간 격노한 아버지가 생선을 집어든 내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고, 퉁겨져 나간 생선이 방 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젓가락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떨어진 젓가락을 다시 집을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금방 퉁퉁 부어 올랐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가 집어준 젓가락을 붙들고 다시 밥을 먹었다. 얼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워서 아프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때 내 안에 아버지만 보면 공포에 떠는 운전사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 어린 운전사가 서른 일곱 살이 되도록 나를 자라지 못하게 하고 내 인생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에 배고파하는 아이도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는 선량했으나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조선조 말 20대 초반의 나이로 지방 현감(지금의 군수)의 자리에 올랐던 나의 외조부는 당시 전국을 강타했던 호열자에 걸려 스물 일곱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부인과 함께 요절하고 말았다. 상주라고는 후일 나의 어머니가 된 11살 짜리 큰딸을 비롯하여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의 병아리 같은 어린 4남매뿐이었다. 어린 4남매는 졸지에 부모를 잃고 외갓집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하늘같은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어머니는 결혼해서도 별로 형편이 좋아지지 않았다. 큰아들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 한을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잊어버리려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무서우리만큼 일에 집착했는데, 마치 일에 중독 된 사람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곤 했다.

타지에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도 일 년의 반은 본가에 와서 지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니도 집안에 있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다시 작은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머니는 여지없이 일 독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면 어머니는 길쌈을 하거나 들일을 하면서 웅얼웅얼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산새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했던 어머니의 그 노래 -가사도 곡조도 없는- 가락은 두견새의 피울음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입술에서 한 서린 웅얼거림이 새어나올 때마다 어린 나의 가슴에도 한이 쌓여갔다. 어머니의 그리움, 회한, 아픔의 감정들이 어린 나에게 깊이 전이되었다. 그것들은 급기야 내 안에 악머구리 같은 운전사를 불러들였다.

날마다 일 속으로 도망치는 어머니, 딴살림을 차린 아버지, 그 사이에서 소외된 우리 형제들은 차곡차곡 한과 분노를 쌓아갔다. 특히 어머니의 첫정을 받고 자란 형보다 나는 외로움과 분노의 감정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 쌓인 분노는 질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진을 다 빼놓고야 끝을 내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울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들로 나가버리곤 했다. 나는 울음을 그쳤다가도 어머니가 돌아오는 기척이 들리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저녁 내내 울고, 울다가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가도 일어나면 다시 울었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잠든 어머니를 발로 툭툭 차면서 울었다. 한여름에 모기장을 치고 어머니가 잠들어 있으면 모기장을 들치고 울었다. 그래도 너무 피곤한 어머니가 모기장을 뒤집어 치고 내쳐 잠이 들면 다시 모기장을 들치고 울어댔다. 어머니는 결국 비상약(말린 낙지 발)을 내 입에 물려주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낙지 발을 물려줄 때까지 나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이런 식으로 울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낙지 발이 내 입에 들어오면 금방 잠이 밀려오곤 했다.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은 낙지 발이 아니라, 낙지 발을 챙겨주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내 안에 가득한 짜증과 욕구불만의 덩어리들은 커가면서 좀 만만하다 싶은 상대에게로 터져 나왔다. 때로 나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맨 첫 번째의 희생양은 불쌍한 동네 아낙들이었다. 그들은 봄이면 먹을 양식을 구하러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가 기다란 막대기로 그들을 때리며 쫓아버리곤 했다.

내 못된 운전사의 두 번째 희생양은 동갑내기 삼식이었다. 삼식이는 우리 집에 자주 일하러 오던 아주머니의 아들이었는데, 날로 잔혹해져 가는 내 운전사의 불쌍한 노리개 감이 되고 말았다. 나는 삼식이를 항아리에 밀어 넣고 뚜껑을 닫을 때마다 공포에 질려 울어대는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다. 삼식이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삼식이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내 가슴이 화로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린다.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기회 있을 때마다 수소문해 보아도 그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세 번째의 희생양은 집안 일을 거들어주던 막둥이였다. 막둥이는 어찌 어찌해서 우리 집에 있게 된 열두 살 짜리 고아였는데, 잔인한 내 운전사가 이 불쌍한 소녀를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나는 온갖 장난질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잖아도 가여운 막둥이를 골려주는 재미가 그렇게 쏠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괴롭히면서도 나는 한번도 막둥이의 괴로움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면서 막둥이는 얼마나 많은 한을 가슴속에 쌓아갔을까! 얼마나 많이 이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했을까? 그래서인지 막둥이도 저 세상 사람이 된지 오래이다. 지금 이 순간도 불쌍한 삼식이, 막둥이, 동네 아낙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왜 내가 그렇게도 잔인하게 그들을 괴롭혔을까? 아빠사랑도 엄마사랑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던 내 마음속의 아이가 짜증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는 사랑으로 채워지기 전에는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법이다.

서른 일곱 살이 되어서야 나는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용납해주는 치유 공동체에서 나는 육 개월을 통곡으로 보냈다. 함께 나누고, 함께 울고, 함께 끌어안고 기도하고 춤을 추면서 나는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에서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누구를 무서워하고 증오하던 내가 사랑과 이해로 이웃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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